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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한일회담반대운동

  • 등록일자 : 16/01/19

서막은 매국노 화형식, 대미는 군화 화형식

두 화형식 사진은 희귀하면서 의미심장한 자료이다. 첫 번째 사진은 1964년 3월 24일 서울대 문리대생의 ‘제국주의자 및 민족반역자 화형집행식’ 장면이다. 학생들이 불태운 것은 이완용과 이케다(池田勇人)의 허수아비이다. 이완용은 ‘제2의 이완용’을 자처하면서 한일국교정상화 과정에 깊이 개입했던 김종필 당시 공화당 의장을 상징하고, 이케다는 당시 일본 수상이다. 학생들은 한일회담 과정과 내용이 굴욕적 매국적 비민주적이라고 규정하고 강력히 반대했다. 이 시위는 그 후 532일 동안 전개된 대일굴욕외교반대운동, 이른바 6·3운동의 출정식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사진은 그로부터 532일 뒤인 1965년 9월 6일 서울대 상대생이 군화와 최루탄, 경찰봉을 불태우는 장면이다. 한일회담반대운동에서 시작해 한일협정 조인반대, 비준저지, 비준무효화운동으로 이어지는 6·3운동의 마지막 시위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60만 군에 대한 모독”이라며 분노한 사건이기도 하다.

6·3운동이 매국노 화형식에서 시작해 군화 화형식으로 끝난 데는 간단치 않은 함의가 있다. 민심의 분노에 대학생이 가세한 4·19혁명과 달리 6·3은 학생운동을 통해 민심을 대규모로 결집한 최초의 사건이다. 당시 심각한 민심 이반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일굴욕외교반대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 박정희 정권이 두 차례나 군을 동원(1964년 6·3계엄령과 1965년 8·26위수령)해서 시위를 진압할 정도였다. 6.3운동이 외부적 동인보다 학생 내부의 세심한 기획과 조직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증거가 화형식이라는 자극적인 장면의 두 사진 속에 숨어 있는 것이다.

시체여! 너는 오래전에 이미 죽었다. 죽어서 썩어가고 있었다. 넋없는 시체여! 반민족적·비민주적 민족적민주주의여! 썩고있던 네 주검의 악취는 사꾸라의 향기가 되어, 마침내는 우리들 학원의 잔잔한 후각이 가꾸고 사랑하는 늘 푸른 수풀속에 너와 일본의 이대잡종, 이른바 사꾸라를 심어 놓았다. (이하 생략)

박정희 정권과 학생운동의 첨예한 대결구도를 고착화한 결정적 계기는 5·20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이라 할 수 있다. 이 사건을 통해 박정희 정권은 학생 시위가 단순히 한일회담 반대가 아닌 반정부 운동으로 파악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정권에 대한 선전포고로 받아들였다. 뒷날의 역사는 그 판단이 옳았음을 뒷받침한다. 당시로서는 학생운동이 노골적으로 반박(反朴) 노선을 천명하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민주화운동 진영 일각에서조차 박정희 정권을 타도 대상으로 규정하기를 주저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 점에서 민족적민주주의 장례식 조사는 두 진영의 관계 정립을 확실히 해낸 기념비적 사료다. ‘시체여, 너는 죽었다’로 시작하는 이 문건의 작성자는 김지하 시인이다. 그와 박정희 정권의 기나긴 악연을 여는 포고문답게 비장하기 이를 데 없다.

“집 팔아서 데모 자금으로 썼다”

박정희 정권 시절의 민주화운동 관련 기록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처벌될 수 있었기 때문에 사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은 게 당연하다. 사료의 절대 부족을 보완하는 또 다른 사료가 당사자의 기억, 즉 구술이다. 6·3학생운동의 봉화를 올린 3·24시위는 서울대에서 오후 1시 20분, 고려대에서 3시, 연세대에서 4시 5분에 각각 시작되었다. 3개 대학이 시간차를 두고 연쇄적으로 거사를 한 것은 주모자들이 연대하여 전술을 쓴 결과이다. 이를 확인해준 것이 현승일(전 국민대 총장)의 구술이다. 

김중태, 김도현과 더불어 ‘6.3 삼총사’ 가운데 한 명이었던 그는 이런 시간차 거사가 세 대학의 지리적 거리를 이용한 경찰 교란 전술의 일환이었다고 증언했다. 화형식 아이디어는 같이 하숙하던 동료의 머리에서 나왔다. 허수아비 제작과 운반을 도운 사람은 하숙집 주인 아들이자 이듬해 동국대 학생운동을 주도한 권석충(전 센트럴시티 감사)이었다. 학교 등록금을 거사 준비금으로 쓴 것은 비단 그에게만 해당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거사 자금 중에 후배가 집을 판 돈도 있었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6·3학생운동의 성격과 진정성을 생생하게 보여준 구술기록이다.

6·3 사료의 결정판 ‘송상근스크랩’

언론보도 자료는 빈약한 민주화운동 사료를 채워주는 중요한 기초자료가 된다. 사건 현장기록이자 여러 가지 간접정보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1단짜리 기사라고 하더라도 취재나 연구로 확장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된다는 점에서 ‘송상근스크랩’은 6.3학생운동 사료의 결정판이라 할 만하다.

송상근스크랩은 송상근 당시 철도병원장(작고)이 수집 정리한 6.3학생운동 자료 스크랩이다. 주로 일간신문의 관련기사를 빠짐없이 모아 붙인 것인데, 45권 5,000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지금은 보관본이 전하지 않는 신문 잡지의 기사도 포함되어 있다. 그의 아들 송철원(현대사기록연구원장, 당시 서울대 정치학과 4년)은 6.3학생운동의 중심부에 있었다. 그래서 6.3 주역들의 서신, 엽서, 메모 등 가치 있는 사기록이 그의 노력으로 스크랩에 남을 수 있었다.

유인물이나 공소장 같은 자료는 그가 애써 수집한 것으로 보인다. 아들을 면회할 때 받은 대기표라든가 사식 신청 목록 등 소소한 것조차 버리지 않은 것을 보면 그의 세심함에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구속자 현황이라든가 백색테러 사례, 면회 일지와 같이 직접 조사 정리해서 첨부한 자료도 있다. 내게 이 자료는 6.3학생운동사 집필을 결심하게 만든 모티브이기도 하다. 송상근스크랩을 통해 취재를 확장해 나간 사례가 많은데, 그 하나가 6.3계엄령 발령 당일 학생들이 경찰 무기고를 지킨 구체적 정황이다. 송상근스크랩이 없었다면 아마 6.3운동의 한 가지 이면을 놓쳤을지도 모른다. 1964년 6월 4, 5일자 신문의 구석에 짤막하게 보도된 것이라 지나쳤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송 원장은 이런 토막기사까지 꼼꼼하게 모아놓았다.

경찰 무기고 점거와 사수

1964년 6월 3일 서울 세종로 일대는 시위로 인해 치안질서가 마비된 상황이었다. 서울시경 순찰대 담장이 시위대가 탈취한 청소차에 의해 무너졌다. 경찰 장비와 무기고가 있는 경내로 시위대가 들이닥쳤다. 그 가운데는 과격분자와 불량배도 있었다. 경찰은 철수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시위에 참가했던 동국대생을 중심으로 20~30명이 즉석에서 경찰 시설과 장비가 약탈 파손되는 걸 막기 위해 규합했다. 

송상근스크랩을 단서로 찾아낸 인형식(당시 동국대 4년)의 구술에 따르면 이들은 3중의 위험을 무릅쓰고 무기고를 보호했다. 사정을 잘 모르는 계엄군, 흥분한 시위대, 상황을 오인한 경찰 가운데 어느 쪽으로부터도 공격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다행히 그런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고, 이들은 공로를 인정받아 경찰 표창과 방위포장을 받았다.

최고의 아이러니는 6.3학생운동 지도부였던 김중태 현승일 김도현이 받은 처분이다. 계엄군법회의는 이들을 내란죄로 기소했다. 공소장에 적시된 내란 혐의의 백미가 바로 “세종로 경찰관파출소 경찰무기고 등을 손상 점거방화하고 군관민 차량을 탈취하는 등”이다. 이들은 5·20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 이후 수배령이 떨어져 도피하다가 6·3이전에 경찰에 자진 출두해 이미 구속된 상태였는데 말이다. 박정희 정권이 학생 시위에 최고 사형까지 가능한 내란 혐의를 덧씌운 첫 사례라는 점에서 이 공소장도 현대사의 훌륭한(?) 기념물이다.

6·3학생운동은 현재진행형이다

대한민국 17대 대통령이 수의를 입고 포승줄에 묶여 재판을 받는 장면이다.(오른쪽에서 두 번째) 아쉽게도 이 사진의 원본은 오리무중이다. 아마 디지털 파일을 생성한 다음에 분실되었거나 다른 곳에 섞여 들어간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사례가 빈번하기 때문에 사료 관리의 중요함을 일깨우는 차원에서 이 사진을 소개한다. 집에 금덩어리를 가지고 있어도 필요할 때 찾을 수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자료와 싸우면서 금언처럼 여기게 된 생각이다. 사료를 잃는 것은 역사를 잃는 것이라고 했던가. 6.3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체결한 한일협정은 두 나라 우호관계의 걸림돌인 과거사 문제를 되풀이하게 하는 시지푸스의 고역이 되었다. 반세기 가까이 지난 시점에 한일관계의 원점 재검토를 주장하는 ‘한일협정재협상국민행동’이 탄생한 것은 6.3운동의 패러다임이 지금도 유효함을 일깨우는 증거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글 신동호(경향신문 선임기자)
<주간경향>에 ‘신동호가 만난 사람’이라는 인터뷰 코너를 진행하고 있다. 학생운동, 민주화운동, 시민운동 관련 기획 취재와 구술 채록을 오래 했다. <오늘의 한국정치와 6·3세대> <70년대 캠퍼스>(전2권) <자연의 친구들: 환경운동25년사1,2>(전2권)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