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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림사건을 딛고 우뚝 선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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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한복판에서 벌어진 납치극

1967년 6월 17일 7시, 아침의 정적을 깨고 요란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여보세요?”
막 외출하려던 중년의 남자가 독일어로 말했다. 전화를 받고 있는 그는 현대음악의 본고장 유럽에서 중진 음악가로 발돋움하고 있던 작곡가 윤이상이었다.
“윤이상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박정희 대통령의 개인 비서입니다. 각하의 친서를 윤 선생님께 직접 전달해야 합니다. 지금 속히 사보이 호텔로 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렇다면, 시간을 내야겠구려.”
아내 이수자가 궁금해하자 윤이상은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사실, 그는 오늘 킬(Kiel) 시의 오페라 극장장과 희극 오페라 <류퉁의 꿈>에 대해 상의한 뒤, 암스테르담과 쾰른에 들러 레코드 취입도 해야 했다. 바쁜 일정이었지만 대통령의 친서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서베를린 슈타이거발트 가 13번지 11층의 아파트에서 나온 그는 낡은 폭스바겐 자동차를 몰고 약속 장소인 사보이 호텔에 도착했다. 하지만, 윤이상은 그곳에서 우락부락한 사내들에게 납치를 당하고 말았다. 박 대통령의 개인 비서를 사칭한 남자는 한국에서 온 근육질의 중앙정보부(중정) 요원이었던 것이다.
납치조 일행은 윤이상을 데리고 쾰른을 경유해 본의 대사관으로 갔다. 그곳 다락방에 윤이상을 감금한 그들은 여러 날 동안 잠 안 재우기 고문을 하면서 협박과 공갈로 거짓 자백을 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괴롭혔다. 며칠 후, 그들은 윤이상을 비행기에 태워 일본을 경유한 뒤 한국으로 끌고 갔다. 대한민국 정부의 사주를 받은 중정 요원들이 국제법을 위반하면서 납치극을 벌인 것이다.

얼마 후, 독일의 주요 신문에 이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한국 출신의 저명한 음악가 이상 윤(Isang Yun), 백주 대낮에 유럽 한복판에서 납치되다!”

윤이상 납치 사건은 전 세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유럽의 음악가들은 이 소식을 접하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 시각 윤이상은 남산 중앙정보부(중정) 본부의 밀실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중정의 고문자들은 윤이상을 발가벗긴 뒤 무릎과 정강이, 허리, 어깨 가리지 않고 구둣발로 마구 찼다. 두꺼운 각목 모서리로 허리와 대퇴부를 연달아 구타했다.

“넌 북조선의 거물 간첩이지? 네가 공산주의자라는 것을 자백해! 우리는 여기서 너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 있어!”

그들은 처음부터 자신들이 꾸민 허위 조서를 읽어주면서 그대로 베껴 쓰라고 강요를 했다. 북한 방문 사실을 들먹이며 거액의 공작금을 받았다는 진술도 하라고 협박했다. 그런 사실 없다고 거부하자 ‘통닭구이’ 고문을 했다. 윤이상을 기다란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물고문을 하는 것이었다. 실신하면 주사를 놓고, 깨어나면 구타와 물고문을 번갈아 반복했다. 극한의 한계 상황에서 항복하자, 고문자들은 강요에 의한 자백 문서를 전리품처럼 흔들며 윗선에 보고하기 위해 방을 나갔다.

윤이상은 이대로 자신이 간첩으로 조작되고 말 것이라는 사실에 진저리를 쳤다. 그는 탁자 위에 있던 두꺼운 유리 재떨이로 자신의 뒷머리를 강타했다. 거듭 세 번을 치자 깨진 뒷머리에서 피가 철철 넘쳐흘렀다. 가물거리는 정신이 아주 나가기 전에 윤이상은 피를 찍어 벽에 글씨를 썼다.

“나의 아이들아, 나는 간첩이 아니다.”

혈서를 쓴 뒤, 그는 혼절하고 말았다.

한편, 이수자도 나흘 뒤 같은 방식으로 한국으로 납치돼 남산에 있는 중정 대공분실로 붙잡혀갔다. 이번에 끌려온 사람들이 약 200명에 달한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1967년 7월 8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동백림 간첩단 사건’에 대해 발표했다.

“이 사건은 관련자인 임석진이 귀국하여 자수함으로써 밝혀졌다. 재독 음악가 윤이상과 재불 화가 이응로를 비롯해 해외에서 활약 중인 교수나 예술인, 의사와 공무원, 유학생과 광원 등 194명이 동베를린(동백림)에 위치한 북한 대사관을 드나들면서 이적 활동을 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북한에 들어가 조선노동당에 입당했으며, 국내에 잠입하여 간첩 활동을 했다.”

발표가 난 이후 정국은 급속히 얼어붙었다. 동베를린사건은 첫째, 1965년 6월 22일 체결한 굴욕적인 한일회담과 관련이 있었다. 둘째, 1967년 총선 때 저질러진 6.8부정선거와 긴밀한 관련이 있었다. 두 사건 모두 전 국민적인 저항에 부딪히자, 박 정권은 국면 돌파의 묘수로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조작해 발표했다. 박정희가 이 같은 공안사건을 조작한 궁극적인 이유는 3선 개헌을 통해 영구집권을 획책하기 위해서였다.

감옥 안에서 완성한 희극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

사형선고를 받은 윤이상이었지만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음표가 떠올랐다. 그는 교도관에게 작곡을 할 수 있도록 부탁했으나 거절당했다. 하지만, 몇 개월 뒤에 악보와 연필, 지우개가 반입되었다.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는 감옥에서 맞이한 한겨울의 한파는 살인적이었다. 물그릇이 얼어붙을 만큼 추운 날, 윤이상은 곱은 손을 호호 불며 악보에 악상과 음표를 기입하고 있었다. 그가 쓰고 있는 악보는 희극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이었다.

그해 12월 13일, 제1심 선고 공판이 열렸다. 이때 한국음악협회 이사장이자 음악가인 임원식이 윤이상을 위해 증언에 나섰다. 법정에 선 그는 열정적인 증언을 하여 방청객들에게 뭉클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나는 전부터 그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유럽 음악계에서는 나 임원식을 위시해 한국 음악가 2, 3백 명을 묶어놓은 것보다 이 한 사람의 비중이 더 큽니다.”

그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윤이상은 1심 공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수자는 징역 5년에서 3년으로 감형되어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이후, 독일의 본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윤이상 석방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듬해인 1968년 2월 5일, 심장 발작의 고통을 참아내는 사투 끝에 〈나비의 미망인〉 총보가 완성되었다. 3월 13일, 제2심에서 윤이상은 15년형으로 감형되었다. 간첩죄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중형이 선고되자 서독에서 대대적인 항의 시위가 일어났다.


5월에는 독일 함부르크 예술원이 윤이상을 정식 회원으로 선출했다. 함부르크 자유예술원 회원이 된다는 것은 음악인에게 주어지는 최상급의 영예였다. 국제 사회는 한국 정부에 대한 석방 압력을 더욱 높여 나갔다. 회장인 빌헬름 말러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칼하인츠 슈톡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 등 음악인 181명이 서명한 항의 서한을 박정희 대통령 앞으로 보냈다. “윤이상의 조속한 석방을 요구한다.”는 내용의 호소문이 서독의 각 신문 1면에 대서특필되었다.

“국제 음악계는 윤이상 씨가 필요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있어서 동서양의 중개자로서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사람입니다. 코리아 음악의 대사(大使)로서 그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람입니다.”

1968년 12월 5일, 제3심 공판이 열렸다. 이 재판에서 간첩 혐의는 모두 사라졌고, 윤이상은 10년 형으로 감형되었다. 이 무렵 서독 정부는 “윤이상을 석방시키지 않으면 한국 정부에 대한 차관 5억 마르크를 즉각 중단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1969년 2월 24일 밤, 박 정권은 전 세계의 음악인들과 문화예술인들의 거대한 연대에 의한 강력한 항의와 석방 요구, 그리고 서독 정부의 압력에 무릎을 꿇었다. 윤이상을 대통령 특사로 석방시킨 것이다.

그 후 윤이상은 국내에서 추방되어 독일로 돌아갔고, 조국의 통일과 민주화를 위해 평생을 바쳤다. 베를린 예술대학 정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1995년 11월 3일 베를린에서 눈을 감았다. 남한과 북한, 동양과 서양의 두 세계에 몸담아온 그는 살아생전 세계 5대 작곡가로 꼽혔으며, 지금도 여전히 현대음악의 거장으로서 전 세계인의 추앙과 사랑을 받고 있다.

글 박선욱(시인, 평전작가)
1959년 나주 출생. 1982년 시 〈누이야〉외 3편이 실천문학 제1회 신인작품으로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이후 대표작으로 《그때 이후》《다시 불러보는 벗들》《세상의 출구》《회색빛 베어지다》 등의 시집과 《채광석 평전》《김대중 평전》《황병기 평전》《윤이상 평전》 등의 인물평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