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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의 6월민주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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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운동을 지원하고 특히 국내운동이 독재정권의 탄압에 의해 답보상태에 빠지거나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이를 뚫어주는 역할을 했던 해외에서의 민주화운동은 6.10민주항쟁을 전후로 가장 역동적으로 전개되었다.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들의 끓어오르는 욕구와 희망은 군부독재 정권의 폭압이 거세질수록 더 커졌고 서울대생 박종철이 고문으로 사망하고 연세대생 이한열이 최루탄을 맞아 사경을 헤매게 되자 폭발했다. 연일 톱뉴스로 보도되는 국내의 상황을 접하던 해외동포들과 유학생들은 더는 직장이나 대학의 강의실에서 조국의 운명을 안타깝게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가장 먼저 독일의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재독 민주화 단체와 몇몇 한인 교회가 움직였다. 이미 1980년 5월, 광주에서의 학살을 현지 TV를 통해 생생하게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다가 베를린 거리로 뛰쳐나와 단식농성과 시위를 한 경험이 있던 그들은 이번엔 보다 조직적으로 집회를 기획했다. 그리하여 독일 각지의 유학생들이 전면에 나서고 기존 민주 단체와 교회 그리고 그들과 연대하는 독일 정당과 인권 단체들이 집회를 후원해, 유럽지역의 민주화운동 역사에 있어서 최대 규모의 조직된 시위가 당시 서독의 수도였던 본(Bonn)에서 열리게 된 것이다.

당시 독일에 거주하던 교포와 유학생은 모두 3만 명 정도에 불과했는데 이중 5백여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6.10민주항쟁의 뜻을 이어 이를 지지하고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해외에서 무엇을 실천할 것인가를 모색하기 위해 1987년 6월 중순부터 준비하여 7월 4일 열린 조국민주화실천대회는 베를린 등의 유학생들과, 민건회와 전태일기념사업회 등 11개 재독한인민주단체협의회, 재독한인교회협의회, 그리고 사민당, 녹색당 등 16개 독일 단체의 참가와 후원으로 치러졌다.

독일 전역에서 참가자들이 스스로 경비를 갹출해서 버스를 대절하거나 승용차나 기차로 이른 새벽부터 집결지인 쥐드프리드호프(Suedfriedhof)로 향했다. 그날은 평소의 독일 날씨답지 않게 한국의 8월처럼 무척 더웠다. 미리 준비한 생수는 집회와 행진 과정에서 금방 동이 났다. 유학생들과 교민들이 함께 며칠 밤을 세워 제작한 '한국 민중의 위대한 유월투쟁 만세' 등이 적힌 플래카드와 민족해방, 민주쟁취, 민중생존권 보장 등의 만장을 앞세우고, 간호사와 광부 출신 교민들로 구성된 사물놀이패, 두레농악단을 선두로 한국대사관을 향한 시위행진을 시작했다. 한국어와 독일말로 독재타도와 국제연대 등의 구호를 외치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소리 높여 불렀다.

시위대는 서독 수상 관저 앞에서 잠시 행진을 중단한 채 사민당 청년단(JUSO) 대표와 제3세계 단체 대표가 연대사를 낭독했다. 시위 장소인 보틀러 광장에 집결한 그들은 4시부터 2시간 동안 대회를 진행했다. 대사관에 파견된 안기부 요원들이 열심히 사진과 비디오를 찍는 가운데, 학생들의 성명서 낭독과 민주단체의 연대사, 한인 교회를 대표한 이해동 목사의 연대사, 독일 단체를 대표한 오스나부르크대학 프로이덴베르크 전 총장 등의 연대사가 이어졌다. 그리고 모두가 함께  We Shall Overcome(우리 승리하리라)을 소리 높여 부르고 ‘군부독재와 투쟁하는 한국 민중 만세’를 힘껏 외쳤다.

이 대회를 통해 재독 유학생과 교민들은 조국의 민중들에게 4.19혁명과 1980년 '민주화의 봄' 당시의 소극적 태도와 낙관적 대기주의가 초래한 불행한 결과를 상기시키면서 투쟁의 고삐를 늦추지 말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노태우의 이른바 ‘시국수습 8개 조항’이 반독재투쟁 전선을 분열시키고 앞으로도 민중투쟁에 대한 탄압을 계속하겠다고 하는 저의를 가지고 있음에 대해 경고했다. 

노태우의 6.29선언 직후 이루어진 독일의 7월 4일 대회는 국내에서 시작된 6.10민주항쟁의 드높은 파도가 해일이 되어 멀리 유럽에 사는 동포들을 덮친 사건으로, 유럽에서 일어난 가장 큰 규모의 동포 집회였으며, 유학생들이 그간의 침묵을 깨고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실천에 앞장섰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일본에서도 국내의 6.10민주항쟁에 연대하는 활동이 각 지역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박종철고문치사사건에 항의하며 고문 근절을 요구하는 집회와 시위가 동경, 오사카 등 대도시에서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한일 민주연대가 강고하게 형성된 일본 내 한국 민주화를 위한 세력들은 6.10민주항쟁 시기 재일동포 중심의 민주단체들과 한국 정치범 석방을 위한 인권운동 단체와 국제연대 단체들이 연대하여 공동시위를 벌였다. 

동경에 본부를 둔 대표적인 국제연대 투쟁단체인 관서PARC(아시아태평양자료센터)는 기관지를 통해 한국의 민주화운동, 인권문제, 노동문제 등에 대하여 소개하여 일본 시민들이 한국의 민주화투쟁을 지원하는 데 많은 공헌을 했다. 6월 26일, 한국에서 6.26평화대행진이 진행되고 있을 때, 관서PARC는 우리문화연구소 양관수 대표를 강사로 초청하여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연대활동을 이어갔다. 

일본인 중심의 ‘일한문제를 생각하는 동 오사카 시민의 모임’은 6월 25일 연대투쟁 참가를 호소하는 글을 통해 한국 민중의 투쟁에 연대하여 일본의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집회가 전개되고 있다고 밝힌 가운데, 오사카에서는 한민통(한국민주통일연합) 등에 결집한 재일한국인들이 오오기마찌 공원에서 ‘민주헌법쟁취 재일한국인 관서(關西)긴급투쟁본부’를 설치하고, 한국 민주화 투쟁을 지원 연대하는 행동을 전개하고 있다면서, 한국의 ‘6.26국민평화대행진’에 연대하고, 한국 민중의 투쟁에 부응해서 한국 민주화 투쟁 지지를 외쳤다.

6월 26일과 27일에는 오사카 한국영사관 앞에서 국제연대 단체 등이 주최하는 연대시위가 열렸고, 오사카 중심가에서는 6.10민주항쟁을 지지하고 연대하는 시가행진이 있었다. 한국의 민주화를 지지하는 연대투쟁은 이미 결성되어 활동해온 한국민주 연대단체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지만, 일반시민들도 많은 호응과 지지를 보여주었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노태우의 6.29선언 이후 국내운동이 양 김 씨를 놓고 분열하는 동안에도 일본에서는 주로 재일동포 정치범 석방과 7~8월노동자대투쟁과 연대하는 방향으로 운동이 전개되었다.

한편 미국에서도 1987년 5월 31일 ‘27년 군사독재 종식을 위한 5월 민주화대행진’ 집회가 워싱턴 백악관 앞의 공원에서 열렸다. 그들은 조국의 민주화와 미국의 독재정권 지원 중단을 요구했다. 거기엔 워싱턴을 비롯해 볼티모어, 필라델피아, 뉴욕, 보스턴, 토론토 등지의 24개 단체가 주체가 되어 4백여 명이 참가했다. 

6.10민주항쟁이 진행되자 20일 정의평화청년연합 등이 주축이 된 대규모 시위가 뉴욕의 유엔본부 앞 함마슐트 광장에서 2천여 명의 동포들이 모인 가운데 치러졌다. 그들은 주한 미 대사의 본국소환 등 미국의 적극적인 역할을 주문했다. 

다음날인 6월 21일, 5.18민주화운동 당시 미국으로 밀항한 윤한봉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재미한국청년연합(재미한청련)의 민족학교가 중심이 되어 로스엔젤레스의 코리아타운에서 1천명의 동포들이 함께 가두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3시간 동안 진행된 시위에서  최루탄 추방과 직선제 개헌을 요구했다. 이들은 6.10민주항쟁의 열기를 모아 8월에는 각 지역의 동포들과 함께 청년 중심의 재미한청련과는 별도의 조직인 한겨레동포운동연합을 결성하여 세대를 망라한 운동의 대중화와 전국적인 조직화를 이루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한편 6월 28일, 워싱턴에서 ‘조국을 위한 대기도 및 궐기대회’가 열렸다. 한국인권문제연구소, 조국민주화촉구 워싱턴위원회 등의 단체와 목사, 신부들이 함께 했다. 이들은 백악관 앞에서 기도를 한 후 국무부까지 도보시위를 벌였다. 민주화를 촉구하는 각종 구호가 적힌 팻말을 들고 직선쟁취 등의 구호를 외쳤다. 시위는 4시간가량 진행되었다. 그러나 6.29선언 이후 재미동포들의 한국 민주화에 대한 뜨거운 기대와 열기는 일시적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그동안 해외운동은 국내운동의 활성화와 심화 정도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으며 발전과 쇄락을 이어왔는데, 노태우의 6.29선언 이후 국내운동권이 대통령 선거에서 누구를 지지하는가에 따라 분열될 때 전선에서 멀리 떨어져있던 해외운동권은 더 심각하게 갈라지기도 했다. 특히 미주에서 그 정도가 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10민주항쟁은 해외운동에 참여하던 동포들의 그간의 이념적 편향을 넘어 하나가 되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으며 대중들과 함께하는 운동으로 발전하는 모습을 주었다

글  어수갑
독일 유학 시절 동포운동단체인 재유럽민족민주운동협의회 총무부장과 한/독판 월간 <민주조국>/ 편집인 거쳐 귀국 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수석연구원 등 역임. 저서로는 <베를린에서 18년 동안 부치지 못한 편지/휴머니스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