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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협정이 남긴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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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협정반대운동은 1964년의 한일회담반대투쟁과 1965년의 한일협정조인반대투쟁 및 한일협정비준반대투쟁, 한일협정비준무효화투쟁 등 회담의 전개과정에 따라 투쟁방향을 조금씩 달리하며 진행되었던 운동 전반을 일컫는다. 이는 5.16쿠데타 이후에 일어난 최초의 민주화운동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국민적인 반대운동에 대해 계엄령과 위수령으로 국민들의 입을 막고 손발을 묶은 채 1965년 12월 28일을 기해 기어코 한일협정을 발효시킴으로써 을사늑약 60년 만에 다시 한일국교를 열었다.

그때 국민들이 그토록 반대했던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일본에 대해 시종일관 굴욕적이고 저자세로 일관한 군사정권의 태도에 대한 강력한 민족주의적 분노였다.

한일협정의 결과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한일 간에 현존하는 여러 문제들 가운데 드러난다. 지금도 일본 대사관 앞에서는 1992년 1월에 시작한 수요집회가 이어지고 있고, 일본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 우기며 아예 그들 교과서에 명시해 놓았다. 그리고 일본의 각종 망언은 계속되고 있다. 도대체 왜일까?

원래 한국은 전쟁의 가해자였던 일본의 식민지이자 최대 피해자로서 배상을 받을 국제법적 권리가 있었다. 하지만 1951년에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일본의 주장에 동조한 미국은 한국에 대해 교전당사국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국내외에서 목숨 바쳐 싸웠던 독립투쟁을 한갓 무위로 만든 그 회의는 철저하게 미국의 전후 세계 재편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미국으로서는 일본에게 극동지역의 안보를 맡기기 위해서 한국을 일본 경제의 배후지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일본도 경제 호황과 성장으로 생기는 과잉생산물의 처리장으로서 한국이 필요했다. 게다가 정권유지를 위해 자금이 필요했던 박정희 군사정권은 일본에 ‘도움’과 ‘원조’를 구걸하고, 일본은 그 대가로 한국 정부의 ‘재산권과 배상청구권’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이렇듯 한-미-일 정권의 이해관계가 삼위일체로 맞아 떨어진 결과가 한일협정이다. 중앙정보부장 김종필과 오히라 일본 외상은 1962년 11월 12일의 비밀회담에서 한일회담 타결의 조건으로 일본이 한국에 무상공여 3억 달러, 유상 정부차관 2억 달러, 민간차관 1억 달러 이상을 제공한다는 메모 형식의 밀약을 체결했다. 이른바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서로 교환했다. 이는 협정체결 당시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 액수는 일본이 불과 몇 년을 침략한 동남아 각국에 지불한 액수보다도 적었다. 

한일문제는 민족적 합의가 절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밀실에서 졸속 처리되었다. 그들은 국민들의 배상요구를 일본이 주장하는 몇 푼의 ‘독립축하금’으로 바꿔치기했으며 조선인 징용과 징병, 일본군 ‘위안부’, 학도병 등 일제하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합당한 배상이나 보상 대신 뒤로 은밀하게 불법적인 정치자금을 받아 챙겼다. 일본 기업들로부터 받은 막대한 자금은 공화당과 대통령 선거자금으로 유용됐음은 물론이다. 대신 일본 기업은 한국에서 각종 특혜와 독점권을 제공받았다.

2005년 국사편찬위가 공개한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1966년 3월 18일자 비밀문서에 의하면 한일협정 당시 “박정희·김종필은 일본에서 거액의 정치자금을 받았다”며, “일본 기업들은 1961년부터 1965년까지 (한국) 공화당 예산의 3분의 2를 제공했고, 6개 일본 기업이 한 기업 당 100만 달러에서 2,000만 달러까지 모두 6,600만 달러를 제공했다.”고 밝혔다.

한일협정의 가장 큰 문제점은, 한일합방이 무효이며 식민지배 36년이 잘못된 과거였음을 명시하지 않은 것이다. 이로써 박정희 정권은 일본이 과거의 식민통치를 합법화할 수 있는 빌미를 스스로 제공했다. 최근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일본 정치인들의 각종 망언의 뿌리가 여기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3년 대통령 취임 경축사절로 내한했던 오노 일본 자민당 부총재의 “박정희 대통령과 나와는 부자지간이므로 한일관계가 잘될 것”이라고 한 오노 망언,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기 때문에 사죄할 필요가 없다며 “한국을 20년 더 지배했어야 했다”는 1965년 다카스기 망언, 그리고 한일회담반대운동이 범국민적으로 번지자 “한국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해서라도 한일회담을 종결할 확고한 결심을 하고 있는 것으로 믿는다”고 한 시이나 일본 외상의 1965년 발언 등 모욕적인 망언의 행렬은 끝이 없었다.

다음은 독도 문제이다. 1965년 6월 22일 조인된 ‘한일 양국 간 분쟁 해결에 관한 교환 공문’은 “양국 정부는 별도의 합의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양국 간의 분쟁은 우선 외교상의 경로를 통해 해결하도록 하며, 이것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경우는 양국 정부가 합의하는 절차에 따라, 조정에 의해 해결을 도모한다.”고 작성되었다. 

이 모호한 규정에 따른 독도문제에 대한 양국의 상반된 주장은 '독도 밀약설'의 배경이 되었다. 의도적으로 한국 정부가 일본의 요구대로 고유영토인 독도 영유권 문제를 한일 간 미해결 문제로 인정하고, 앞으로의 현안으로 남겨두었다는 것이다. 애초부터 당시 집권세력들에게는 독도가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나 얼마나 중요한 가치가 있는 영토인지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 결과 나온 ‘해법’이 이른바 ‘독도폭파 합의설’이다. 1965년 5월 18일자 미국무부 문서 회의록에 따르면 딘 러스크(Dean Rusk) 미 국무장관이 한일협상의 빠른 타결을 희망하자, 박정희 대통령이 “비록 작은 것이기는 하나 협상에서 신경 쓰이는 문제들 중 하나는 독도”라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그 섬을 폭파해 없애버리고 싶다”고 발언하였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보다 앞선 1962년 10월 29일, 박정희는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을 시켜 딘 러스크 미 국무장관과의 회담에서 독도는 ‘갈매기들이 배설물을 떨어뜨리는 장소’일 뿐이며 독도문제 때문에 한일회담이 교착되고 있으니 일본 측에게 ‘아예 독도를 폭파시켜 버리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미국의 잘못도 크다. 애초에 미국은 1947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구상할 때는 독도를 한국령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대일 유화정책으로 전환하면서 독도를 일본령으로 규정했고, 이는 ‘러스크 각서’로 확인되었다. 미국은 1951년 8월 10일 미국 국무부 극동담당차관보 딘 러스크 명의의 각서에서 “독도는 1905년 이래 시마네현 관할이었고, 그동안 한국은 한 번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지적했다. 러스크 문서란 한국이 조약 조문에 독도가 한국령임을 명기해달라는 요청에 대한 회신이었다. 현재도 일본은 이 러스크 각서를 유력한 근거자료로 제시하며,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이다. 한일협정 체결 당시 일본 정부는 위안소 설립 개입 자체를 부인했다. 그러나 1996년 발표된 UN인권위원회 보고서는 한일협정이 일본군 ’위안부’의 청구권을 소멸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이로써 일본은 한일협정 체결로 일본군 ‘위안부’의 청구권이 소멸했다고 주장할 권리는 잃게 되었다. 게다가 한일협정은 한일 양국의 재산과 경제적 관계에 대한 문제만을 다룬 것으로, 인권문제나 전쟁범죄 문제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즉, 반인권적인 전쟁범죄의 피해자가 마땅히 가지는 배상청구권을 조약이나 협정으로 소멸시킬 수는 없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은 진상규명, 사죄, 배상, 책임자 처벌, 역사교육, 기념사업이라는 과거사 문제 해결의 큰 원칙에 따라야하는 것이지 권력자의 독단으로 외부세력의 이해관계나 압력으로 ‘합의’할 일은 결코 아니다. 기억을 왜곡하기 위한 합의이거나 과거를 망각하기 위한 합의라면 그 합의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망각은 궁극의 거짓말이다”(정유정 <종의 기원> 인용). 하지만 도저한 시간의 흐름은 망각의 편이다. 그러므로 망각에 맞서는 일이야말로 역사의 의무이다.


참고하기: 사료로 배우는 한일회담반대운동  http://contents.kdemo.or.kr/sub03/sub03_01.html

글  어수갑
독일 유학 시절 동포운동단체인 재유럽민족민주운동협의회 총무부장과 한/독판 월간 <민주조국>/ 편집인 거쳐 귀국 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수석연구원 등 역임. 저서로는 <베를린에서 18년 동안 부치지 못한 편지/휴머니스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