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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지마! 최루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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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요즘 최루탄 중독인가 봐? 하루라도 최루탄 냄새를 맡지 못하면 잠이 안 오니까 말야.”

대머리 양 과장이 공연히 또 너스레를 떤다.

“손발은 안 떨려요? 식은땀은?”

손 대리가 돈 안 드는 일이라고 한 술 더 떠 맞장구를 쳐준다.

“응. 그런 것도 같기도 하구”

“괜찮아요. 오늘 또 팡팡 터뜨려줄 텐데요. 뭐, 눈물 콧물 왕창 한번 쏟고 뒷골목 가서 쐬주나 한잔해요. 그러면 확 다 날아가버릴 테니까요. 크크크.”

손 대리의 말에 양 과장도 실없이 허허 따라 웃을 도리 밖에 없었다. 6월 들어 아닌 게 아니라 거리는 온통 최루탄 천지였다. 최루탄 가스로 도배라도 할 참인지 연일 쏘아대고 있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최루탄 생산 공장의 재고가 바닥이 날 정도라고 했다. 전두환 군사정권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시위대를 향해, 아니 온 천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최루탄을 쏘아대는 것 밖에는 없는 듯했다.

“근데 갈수록 더 지독해 지는 것 같아. 눈물 콧물은 고사하고 온몸을 바늘로 쑤시는 것 같이 따가워서 식은땀이 다 나더라고... 우리야 그렇다지만 길 가는 노인네랑 아이 업은 아주머니들은 지옥이 따로 없더라고.”

“죽일 놈들. 국민들 세금으로 하는 짓이라곤...”

너스레 끝의 진담이지만 손 대리는 눈에 핏발을 세웠다.

“그나저나 한열이 이야기 들었어요?”

“연세대생 이한열이?”

“예.”

“응. 어떻게 됐어? 중태라지.”

손 대리는 대답 대신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무자비하고 거침없는 최루탄 세례는 마침내 며칠 전 대형사고를 낳았다. 

1987년 6월 9일 오후 5시. 6.10국민대회 출정식을 마치고 교문을 향해 가는 시위대를 향해 경찰은 조준 사격에 가까운 자세로 최루탄을 쏘았고, 그 찰나 최루탄 파편에 머리를 맞은 이한열은 모로 쓰러졌다. 함께 있던 이종창이 두 팔로 부축해 일으켰지만 이한열은 축 늘어진 채 의식이 없었다. 피가 얼굴을 타고 내렸다.  이 장면을 로이터통신의 정태원 기자가 찍었고, 삽시간에 외신을 타고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이한열은 가까스로 병원에 옮겨졌지만 살아날 가망은 거의 없었다. 최루탄은 더 이상 최루탄이 아니라 살인탄이나 다름없었다. 

소식을 듣고 병원에 도착한 이한열의 부모님은 인공호흡기를 꽂고 겨우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아들을 보자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한열아! 우리 한열아...!”

어머니의 울부짖음이 모두의 가슴을 울렸다. 학생들은 낮에는 거리 시위에 나섰다가 밤이 되면 이한열이 누워있는 세브란스병원에 모여 24시간 그의 곁을 지켰다. 보도가 나가면서 시민들의 성금과 격려가 쏟아졌다. 지금까지 구경만 하던 학생들도 달라졌다. 연세대 의대와 간호대는 이한열을 위시하여 연일 늘어가는 최루탄 부상자를 보살피기 위해 의료대를 구성하여 시위 현장으로 달려가 구호 작업을 벌였다.

시위대에 대한 경찰의 진압 방식은 날로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계엄령을 내려 군인들을 투입할 거라는 소문도 들렸다. 그렇다고 하여 한번 불붙은 민주화의 불길이 삭을 리 없었다. 아니, 그러면 그럴수록 분노의 불길은 더욱 거세게 타올랐고, 군부독재에 대한 거침없는 항쟁은 날로 가속화되었다.

“최루탄을 쏘지마!”

“군부독재 물러가라!”

애타는 소리가 입에서 입을 타고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마침내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는 6월 18일을 ‘최루탄 추방의 날’로 선포했다. 이번에는 구속자 가족 중에서 주로 여성들로 이루어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어머니들이 앞장을 섰다. 삼베수건을 쓴 어머니들은 최루탄 발사기를 들고 서있는 전경에게로 다가가 그들 가슴에다 장미꽃과 카네이션을 달아주었다. 로마병사처럼 생긴 투구와 발사기의 총구에다 꽃을 꽂아주는 사람도 있었다. 싫다고 뿌리치거나 화를 내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말없이 눈물을 삼키는 전경도 있었다. 지금은 비록 전경으로 들어와 시위대를 막고 최루탄을 쏘는 입장이었지만 마음만은 그들과 함께 한다는 말없는 전언이었다.

투구 철망 너머로 보이는 얼굴은 시위대에 참가하고 있는 학생들이나 다름없는 앳된 얼굴들이었다. 실제로 학교 다니다 전경으로 복무하는 청년들도 많았다. 그들 역시 민가협 어머니들에겐 자식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들 젊은이들을 서로 갈라놓고 최루탄과 짱돌로 마주하게 한 독재정권이 미울 뿐이었다.

“최루탄 없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 최루탄을 추방하자!”

그러나 오로지 공권력에 의존해 정권을 유지해야 하는 전두환 군사정권이 그 말을 들어줄 리는 없었다. 이한열의 중태에도 불구하고 무차별적으로 최루탄을 발사했다. 구름처럼 최루가스를 뿜어대는 장갑차를 동원해 무법자처럼 거리를 밀고 다니는 것도 예사였다.

그날 6월 18일, ‘최루탄 추방의 날’도 마찬가지였다. 시위대의 범위와 규모는 6월 10일을 넘어서고 있었다. 박종철에 이어 이한열마저 독재의 제단 앞에서 쓰러져 가는 것을 본 국민들은 서울은 물론이고 부산 광주 등 전국에서 일어났다. 이 거대한 민중의 물결 앞에 군부 정권은 자신의 한없는 초라함과 불안함을 가리기라도 하듯 다시 무차별로 최루탄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어이, 손 대리! 여기야 여기!”   

멀리 사람들 속에서  손을 흔드는 사람, 대머리 양 과장이었다. 그날은 두 사람이 나란히 넥타이부대에 섞여 명동으로 가고 있던 중이었다. 갑자기 최루탄이 터지면서 두 사람은 잠시 헤어졌는데 조금 있다가 자욱한 최루탄 속에서 양 과장이 손을 흔들며 부르고 있었다. 손 대리는 급히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가니 양 과장은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정신을 못차리고 있었다.

“양 과장님! 휴지 여기... 그리고 치약. 치약을 눈가에 바르세요!”

“어와~! 죽겠구먼. 저어기 골목으로 잠시 피하자구.”

양 과장이 신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두 사람은 사거리 뒤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골목 안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거나 인근 상점에서 물을 구해 씻고 있었다.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가 동지였고 친구였고 이웃이었다. 담배도 서로 나누어 피웠다.

“그나저나 양 과장님, 소원 푸셨어요.”

“엉? 뭔 말?”

“왜 아침에 과장님 최루탄 중독이라고 하셨잖아요? 최루탄 냄새 못 맡으면 잠도 잘 오지 않는다고... 오늘 밤은 잘 주무시게 되었잖아요?”

“어어, 허허허. 그랬지. 맞어, 맞어!”

대머리 양 과장이 이빨을 환히 드러내고 사람 좋게 웃었다.

“최루탄 추방의 날에 맞은 최루탄이라! 햐아, 이러다간 진짜로 중독되는 거 아냐?”

“진짜로 최루탄이 추방되는 날은 아직 멀었어요. 자아, 과장님! 좀 쉬었으니까 우리도 또 나가서 힘을 보태야지요. 이따 제가 쐬주 한잔에 삼겹살 사드릴게요!”

“허허. 됐네. 이 사람! 내가 사야지.”

따끔거리던 피부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두 사람은 다시 천천히 거리로 나가 보았다. 시위대 쪽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새 나라의 대통령은 일찍 물러갑니다. 장기 집권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그러자 곧 이은 구호도 옛날과는 달랐다.

“군부독재 타도하고 부모님께 효도하자!”

“대통령이 술잔이냐 친구끼리 돌려먹게!”

“부처님도 열 받았다 군부독재 끝장내자!”

그때마다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것은 민주화의 대장정 중에 일어난 감흥이었고 여유였다. 양 과장과 손 대리도 힘차게 따라 구호를 외치며 그들 속에 파묻혔다. 최루탄 연기가 안개처럼 밀려왔다.

글 김영현(소설가)
1984년 창작과비평사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로 등단, 소설집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 <해남 가는 길>, <내 마음의 망명정부>, 장편 <풋사랑>, 시집 <겨울 바다>, <남해 엽서>등이 있다. 제23회 한국창작문학상 수상, 실천문학사 편집장 역임, 한신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하다가 현재는 양평에서 창작과 공부에만 열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