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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농민회총연맹_ 개발독재의 희생양에서 농민운동의 구심점으로

해방 이후 가장 격렬했던 2.13여의도농민대회

1989년 2월 13일 오후, 여의도광장에 민중가요인 〈광야에서〉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전국 99개 군에서 400여 대의 버스에 나눠 타고 모인 25,000여 명의 농민들이 ‘수세(水稅) 폐지 및 고추전량수매 쟁취 전국대회’를 개최하는 중이었다. 하늘 높이 치솟은 대나무에 매달린 수백여 개의 만장과 깃발이 기운차게 펄럭이는 가운데 한목소리로 부르는 농민들의 노랫소리는 광장 전체를 울리고도 남을 만큼 크고 우렁찼다.

“찢기는 가슴 안고 사라졌던 이 땅에 피울음 있다/부둥킨 두 팔에 솟아나는 하얀 옷에 핏줄기 있다/해 뜨는 동해에서 해 지는 서해까지/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 벌판/우리 어찌 가난하리오 우리 어찌 주저하리오/다시 서는 저 들판에서 움켜쥔 뜨거운 흙이여.”

때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증권맨 A씨는 옆에 있는 동료에게 말을 걸었다.

“대학 때 농성하면서 참 많이도 불렀던 노래인데 오랜만에 들으니 반갑군.”

같은 증권사에 다니는 B씨 역시 감회가 새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을 때 행사장에 집결한 농민들이 구호를 외쳤다.

“농민들을 수탈하는 수세를 폐지하라!”

“고추 전량 수매 쟁취하자!”

1부 행사를 마친 농민들은 전국에서 수거한 수세 고지서를 불태움으로써 반농민적인 정부 정책에 대해 항의하는 퍼포먼스를 벌인 뒤 ‘80년의 수리역사 농조 폐지 결사반대’란 플래카드를 앞세워 국회의사당 쪽으로 행진했다. 4당 대표와 농정에 대한 대책을 토론하기 위한 평화로운 행진이었다. 농민들이 질서 정연하게 행진하고 있을 때, 광장을 에워싸고 있던 경찰들이 일제히 최루탄을 쏘며 농민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두두두두두!”

그와 동시에, 하얀 헬멧을 쓰고 청바지를 입은 사복 경찰들이 무서운 속도로 농민들을 향해 돌진했다. 그들은 선두의 농민들을 향해 기다란 진압봉을 마구 휘둘렀다.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된 농민들이 길바닥에 나뒹굴었다.

“어! 저거 저, 백골단 아니야?”

“맞아! 저 백골단 놈들이 사람을 곤죽으로 만들고 있어!”

A씨와 B씨는 먼발치에서 잔인한 진압 장면을 지켜보다가 그만 공포에 질린 표정이 되고 말았다. 전투경찰보다 앞장서 시위 진압에 나섰던 백골단은 1980~90년대 내내 악명을 떨쳤다. 그들은 시위 주동자를 표적으로 삼아 끝까지 추적했고, 한번 그들의 손에 걸리면 거의 실신할 정도로 무자비하게 구타를 일삼았던 야차 같은 존재였다.

“백골단은 물러가라!”

“평화로운 행진을 막지 마라!”

농민들은 물러서지 않고 만장과 깃발을 매달았던 대나무로 죽창을 만들어 백골단에 맞섰다. 광장은 페퍼포그 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아비규환의 전쟁터로 바뀌었다. 방석모와 곤봉으로 무장한 전투경찰은 로마 병정처럼 농민들을 압박해 들어갔고, 방패와 진압봉을 든 운동화 차림의 백골단은 붕붕 날면서 농민들을 짓밟았다. 비무장의 농민들은 광장 여기저기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분노한 농민들은 KBS 마크가 찍힌 방송 차량과 정부 관리들이 타고 온 업무 수행 차량을 불태우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했다.

공안 정국에서 단일조직으로 탄생한 전국농민회총연맹

1987년 이래 농촌에 대한 정부의 정책은 수수방관 혹은 방임에 가까웠다. 이 같은 무대책 속에서 고춧값이 폭락해 대다수 농민의 살림살이가 파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엄중한 때에 수세제도의 불합리성과 농지개량조합의 비민주적 운영 실태마저 드러나 농민들에게 실망과 좌절을 안겨주었다.

1988년에 등장한 노태우 정권은 전두환 정권과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듯했으나 말뿐이었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추곡 수매에 대한 국회동의제가 실시되는 등 전향적인 흐름이 보였으나 실제로는 지지부진했다. 노 정권의 유화적인 제스처는 민심을 달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농민들은 농촌의료보험개혁투쟁과 농지개량조합의 비민주적 운영에 항의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본격적인 대중투쟁의 일환으로 수세투쟁과 농산물제값받기투쟁을 병행하기로 결의한 농민들은 1988년 11월 1일 전국수세폐지대책위원회 등을 꾸렸다. 이후, 전국 각지에서 400여 차례에 걸쳐 수세 폐지와 고추전량 수매를 위한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하지만, 문제점이 개선되지 않은 가운데 고춧값은 더 폭락하고 농촌 경제는 한층 피폐해 가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에, 농민들은 국회 개원 시기에 맞춰 자신들의 절박한 생존문제를 대대적으로 알리기 위해 여의도광장에서 대규모 농민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대회는 서부의 평야지역 연합과 동부의 중산간 지역 고추 주생산지 농민들이 연대하여 전에 없이 규모가 커진 데다가 전국농민운동연합과 가톨릭농민회, 한국기독교농민회 등 3개 농민단체뿐만 아니라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 학생들까지 참여한 까닭에 사상 유례없는 대규모 집회가 되었다.

여의도농민대회 이후 정부는 곧 농민운동 지도자와 전민련 의장, 전대협 의장 등 민족민주운동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령을 내렸다. 그 결과 전국에서 연행된 사람만 총 458명에 달했고, 사법 당국은 이 가운데 117명을 입건한 뒤 6명을 구속했다.

이에 반발한 농민들은 2월 25일 ‘여의도 농민집회 폭력진압 규탄과 수세 완전폐지를 위한 전국농민대회’를 전국 26개 군에서 동시에 개최하며 투쟁에 돌입했다. 거듭되는 정권의 대대적인 탄압 속에 농민운동은 그 위세가 크게 꺾였다. 공안 당국은 여세를 몰아 “가톨릭농민회, 한국기독교농민회가 농민시위의 배후세력이다.”라며 겁박을 일삼았다.

비록 상당수의 희생을 치르기는 했지만, 여의도농민대회는 정부의 무관심과 폭력적인 대응을 환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농민문제에 대한 국민 공감을 확산시키고 수세인하의 성과를 거두었다.

백골단의 폭력진압과 이에 맞선 농민들의 ‘죽창시위’로 기억되는 여의도농민대회는 1960~70년대를 관류하는 개발독재에 의해 줄곧 억눌려 왔던 농민들이 민주운동 세력들과 연합해 비로소 떨쳐 일어난 획기적인 사건이다. 고도산업 성장정책을 추구하느라 농촌의 피폐한 현실을 도외시한 독재정권의 관성이 1980년대 들어와 개선되기는커녕 농축산물 수입개방조치로 이어지면서 더 악화되자, 더이상 참을 수 없게 된 농민들이 함께 힘을 뭉친 처절한 생존권 투쟁이다.

수많은 투쟁 끝에 전국 단일 농민조직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 농민들은 1989년 3월 1일 ‘전국농민운동연합(전농련)’을 결성했다. 가톨릭농민회와 기독교농민회, 개별적인 군 농민회를 비롯한 전국의 90여 개 농민운동 조직, 그리고 1980년대 후반기부터 속속 만들어져 활동하기 시작한 자주적인 농민대중조직의 일부가 연대해 거대 조직을 발족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70년대 후반 들어 가톨릭농민회와 기독교농민회, 대학교 운동권의 든든한 후원을 받아 함평고구마사건을 승리로 이끌면서 생기를 띠게 된 농민운동은 점차 자생적인 모임과 그 안에서 성장한 사람들의 헌신과 열정으로 알맹이를 채워 갔다.

1990년 4월 24일, 수많은 모색과 진통 끝에 건국대학교에서 마침내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창립대회가 열렸다. “우리는 전국 7백만 농민을 대표하여 오늘 전국농민회총연맹이 창립되었음을 엄숙히 선언한다. 이제 농민조직은 하나이다. 전국의 모든 군 농민조직이 전국농민회총연맹의 깃발로 강고하게 결합한 것이다.”라는 창립 선언문에 나와 있듯이 전국 군 단위 74개 농민회로 구성된 당당한 전국 조직, 7백만 농민을 대표하는 거대 단일조직이 탄생한 것이다. 경선으로 치른 이날의 총회에서 의장에 권종대, 사무처장에 강기종이 선출되었다.

전농은 1990년대 들어와 우루과이라운드반대투쟁을 벌였고, 2000년대 들어와 수입쌀반대운동을 전개했으며 전국 교직원 노동조합, 전국 공무원 노동조합, 현대 중공업 노조 등과 함께 한미FTA반대운동을 벌였왔다. 이후, 전농은 민주 세력과의 연대를 강화하고 그 폭과 영향력을 증대시켜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글 박선욱(시인, 평전작가)

1959년 나주 출생. 1982년 시 〈누이야〉외 3편이 실천문학 제1회 신인작품으로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이후 대표작으로 《그때 이후》《다시 불러보는 벗들》《세상의 출구》《회색빛 베어지다》 등의 시집과 《채광석 평전》《김대중 평전》《황병기 평전》《윤이상 평전》 등의 인물평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