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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학련사건 - “사형선고를 받아 영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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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탱크에 점령당한 미라보 다리

1972년 10월 17일 늦은 오후. 깊어가는 가을이 석양을 받아 황금빛으로 물들 때였다. 서울 종로구 동숭동 개천을 가로지르는 시멘트 다리 위에는 여느 날처럼 학업을 마친 서울대 학생들이 한가로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학생들이 미라보 다리라 부르는, 문리대 정문과 도로를 잇는 다리였다.

‘우르릉 우르릉....’

조용한 거리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것은 5시 경이었다. 둔탁하고도 기분 나쁜 굉음이었다. 멀리서부터 차츰 가까워지는 소리에 학생들은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이게 무슨 소리지?”

“글쎄, 종로 쪽에서 나는 것 같은데?”

불길한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몇몇 학생들이 무슨 일인가 종로 5가 쪽을 향해 뛰어갔다. 그러나 몇 십 미터도 못 가 발걸음을 딱 멈추었다. 늘씬한 포신을 앞세운 탱크 두 대가 막 모퉁이를 돌아 그들을 향해 질주해 오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학생들은 아무 말도 못한 채 비켜섰다. 그들 곁을 지나간 탱크는 미라보다리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포신을 돌려 길 가는 시민들을 겨냥했다. 뒤따라 탱크에서 뛰어내린 군인들이 다리를 차단해 버렸다.

두 시간 후인 7시, 라디오는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음을 알렸다. 국회와 정당은 해산되고 대학에는 휴교령이 떨어져 학생들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국회의사당과 대학정문에는 육중한 탱크들이 배치되어 통행을 막았다. 박정희는 담화를 통해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따라 한국인에게 맞는 새로운 헌법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이른바 10월유신이었다.

전쟁이 난 것도 아니었다. 사회가 시위로 혼란한 것도 아니었다. 3년 전인 1969년, 박정희는 헌법에서 정한 두 번의 대통령 임기가 끝나자 대통령을 한 번만 더하겠다며 3선개헌안을 통과시켰다. 그런데 세 번째 임기가 다시 1년밖에 남지 않자 아예 대통령에 대한 임기 제한을 없애고 국민으로부터 대통령 선출권도 빼앗아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어용기관에 맡기는 사상 초유의 독재헌법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막기 위해 조용하던 나라에 갑자기 계엄령을 내린 것이다.

머지않아 지긋지긋한 공포정치가 끝나리라 기대하던 국민들은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궤변을 앞세운 친위쿠데타에 분노했다. 그러나 탱크를 앞세운 폭압에 눌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일 년이 지날 때까지는.

2. 대학생들의 선도투쟁

이듬해인 1973년 10월 2일 오전, 서울대 문리대 교정은 평소와 달리 들뜬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10시가 넘어가면서 교정 가운데 4.19탑 주변에는 삼삼오오 모여드는 학생들이 늘어나더니 오전 11시 경이 되자 6백 명을 넘어섰다. 마침내 한 학생이 선언문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오늘 우리는 전 국민대중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이 참혹한 현실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어 스스로의 양심에 따라 무언의 저항을 넘어서 분연히 일어섰다!”

유신쿠데타 이후 최초의 학생시위였다. 또한 이후 다섯 달 동안 계속될 소요의 서곡이었다. 시위대에는 여학생들도 많았다. 학생들은 유신헌법 폐지, 정보정치 중단 등을 외치며 스크럼을 짜고 교내를 행진하다가 진입한 경찰에 의해 2백 명이 연행되면서 해산되었다.

시위는 이화여대, 연세대 등 주요대학으로 번져나갔다. 단과대 학생 전원이 참가하는 동맹휴학도 잇달았다. 이에 정치권과 재야운동도 가세했다. 12월에는 헌법개정청원운동본부가 발족되어 본격적인 유신철폐운동에 들어갔다.

박정희는 해가 바뀐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를 선포했다.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토론을 금지시킨다는 기상천외한 법률이었다. 하지만 이 조치는 들불처럼 번져나가는 민주화요구에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긴급조치 1호가 내려진 지 이틀 후인 1월 10일, 서울대생 유인태의 집에 이철, 나병식, 서중석 등 열 명 가까운 대학생들이 모였다. 지방대학을 대표해서 올라온 학생도 있었다. 이들은 대학이 개강하는 3월부터 대학별로 시위를 벌이다가 4월 초에 전국적으로 시위를 일으키기로 했다.

“민주주의를 위한 우리의 순수한 의도가 왜곡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조직이나 이름을 갖지 않기로 하자.”

“야당 등 어떠한 정치세력의 지도도 받지 않아야 해. 단, 윤보선 대통령 등 민주화운동의 원로들에게는 알리자.”

이 날의 결의에 따라 3월부터 서강대, 연세대 등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지방에서는 대구의 경북대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전국적인 시위는 4월 3일로 정해졌다. 최대한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인 시위를 하기로 했지만 유인물 아래 이름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이름을 달기로 하고 일부 유인물에 이를 명시했다.

군사정권도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서강대 시위가 실패한 3월 하순부터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어 최초 주동자였던 서중석 등 수백 명이 끌려갔다. 중앙정보부는 이들을 고문해 전국적인 공산주의자 조직을 조작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약속한 4월 3일, 서울의 주요대학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서울대 의대생 5백 명이 흰 가운을 입고 가두로 진출하려다 봉쇄되기도 하고 이화여대 3천 명이 채플시간에 선언문을 낭독하고 이중 40명이 청계천에서 시위를 벌이는 등 규모는 크지 않았으나 독재정권을 긴장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이날 밤 10시, 여정남과 이철, 유인태 등 시위주동자들은 광화문 뒷골목에서 소주를 마시며 향후 방향을 상의하고 있었다. 돌연 라디오 정규방송이 중단되고 중앙정보부장 신직수가 발표하는 특별성명이 들려왔다.

“공산주의자들의 배후조종을 받은 민청학련이 화염병과 각목으로 시민폭동을 유발했으며, 정부를 전복하고 노농정권을 수립하려는 국가변란을 기획했다.”

동시에 긴급조치 제4호가 발표되었다. 민청학련과 관련된 일체의 활동에 대해 사형까지 처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학생들의 순수한 민주화시위가 북한의 사주를 받은 공산주의 폭력혁명으로 누명을 쓰는 순간이었다. 군사정권은 수배된 민청학련 지도부에 대해 일인당 3백만 원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간첩신고 포상금이 30만원이던 시절이었다.

3. 죽은 자들에 대한 무죄선고

전창일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그의 옷을 완전히 벗겨 전신 나체로 시멘트 바닥에 꿇어앉힌 다음 손목과 발목에 수건을 감고 포승줄로 양 손목과 두 발목을 꽁꽁 묶었다. 긴 막대를 사이에 끼워 두 사람이 덜렁 들어 올려 책상 두 개 사이에 걸쳐 놓으니 마치 도살장에서 네 발 짐승을 묶어 매단 것 같았다. 그들은 전창일의 얼굴에 수건을 씌우고 콧구멍에 주전자로 물을 부어 넣기 시작했다.

“서울대 최종길 교수도 이렇게 우리가 죽였어. 그래도 우린 끄덕없다. 너 같은 놈은 죽여도 아무런 상관없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는 한참 버둥대다 못해 비명 지를 힘도 없이 기절하고 말았다. 정신을 차리니 그들은 책상에 앉혀 놓고 종이를 들이밀었다.

“너 인민혁명당에 가입해 민청학련을 지도했지?”

“아닙니다!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일입니다, 헉!”

말을 마칠 수가 없었다. 정보부 요원들은 의자를 넘어뜨리고 바닥에 쓰러진 그에게 발길질과 몽둥이질을 해댔다. 그는 또 다시 도살장의 짐승처럼 거꾸로 매달렸고 결국 자신이 인혁당의 핵심이라고 거짓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사정부는 민청학련사건으로 연행한 1,024명에게 무지막지한 고문을 가해 공산주의자로 몰아갔다. 북한 간첩 누구를 만났는가, 북한에는 언제 다녀왔는가가 필수 질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대구 출신들은 인민혁명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을 씌우기 위해 더욱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애초에 인민혁명당사건은 1964년에 조작된 사건이었다. 대구지역 민주인사들과 학생들을 엮어 인민혁명당을 만들었다는 누명을 씌운 것이다. 그러나 재판과정에서 고문에 의한 허위임이 드러나 도예종 등 2명만 가벼운 형을 받고 나머지는 무죄로 석방되었다.

그런데 10년 만에 인민혁명당이 다시 등장한 것이었다. 경북대 출신 여정남이 일련의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데서 착안한 것이다. 그들은 인혁당이 민청학련을 배후조종해 공산주의 혁명을 기도했다는 내용의 조서를 꾸며나갔고,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한 이들은 초죽음이 된 상태로 강제로 지문날인을 해야 했다.

군사법정에서 열린 재판에서는 어깨에 번쩍이는 별을 단 장성들이 일체의 반론도 허용하지 않은 채 민청학련 7명, 인혁당 7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여정남은 인혁당이지만 민청학련을 지도했다고 해서 민청학련 사형수에 포함되었다.

서울대생 김병곤은 사형언도를 받자 당당히 외쳤다.

“영광입니다!”

재판관을 향한 것이 아니라 국민을 향한 외침이었다. 군사정권도 국민의 눈을 의식했는지 민청학련 관련자 대부분을 조기 석방했다. 그러나 세칭 인혁당 관련자는 끝내 공포정치의 희생물로 삼았다. 

이듬해인 1975년 4월 9일, 여정남을 포함한 인혁당 관련자 8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 바로 전날 대법원에서 최종 선고를 받은 지 18시간 만이었다. 그들의 억울한 누명은 32년이 흐른 2006년에야 벗겨졌다. 법원은 그들이 민주주의 운동을 했으며 인민혁명당 같은 것은 상의한 적조차 없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죽은 자들에 대한 무죄선고였다.

글 안재성

1989년 장편소설 <파업>으로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이후 대표작으로 <사랑의 조건>, <황금이삭>, <경성트로이카>, <연안행>,등의 장편소설과 <이현상 평전>, <박헌영 평전> 등의 인물평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