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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열을 아시나요? - 4.19 혁명
“주열이를 찾습니다, 김주열! 우리 주열이를 보신 분!”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 항의시위에 참가했다 행방불명이 된 아들을 찾아 멀리 남원에서 마산으로 달려온 한 여인의 애끓는 소리가 20여일 째 거리를 떠돌고 있었다.
당시 열일곱살의 김주열은 고향인 남원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마산고등학교에 다니는 형을 따라 마산상고에 입학시험을 치기 위해 친척집에 머물던 중이었다. 어머니의 애끓는 하소연에도 불구하고 김주열의 행방은 묘연하였다. 서울에서 내려온 야당 조사단에게 호소하여 시청 뒤 물탱크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 권찬주 여사의 애끓는 자식 찾기 사연은 당시 15만 마산 시민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그런 날들이 20여일 지나가고, 김주열의 어머니도 다시 고향인 남원으로 돌아간 지 사흘 째 되던 날.
1960년 4월 11일. 오전 11시 20분.
마산 신포동 중앙부두 앞에서 200미터 정도 떨어진 바다 위에 시체 한 구가 떠올랐다. 오른쪽 눈은 부릅뜬 채 왼쪽 눈에 포탄같이 생긴 쇠붙이가 머리를 관통한 끔찍한 모습이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그 쇠붙이는 직경 5cm, 길이 20cm에 탄피가 알루미늄으로 된 미제 고성능 최루탄으로 꼬리부분에 프로펠러가 달려있고 벽을 뚫고 들어가 폭발하게 설계된 대 무장폭도용 최루탄이었다.
시체는 어린 학생이었으며 교복을 입고 있었다.
“김주열이닷!”
모여있던 사람들은 단번에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소리를 쳤다. 그 소문은 금새 입에서 입으로 전해 삽시간에 마산 시민 모두에게 알려졌다.
“주열이가 발견되었다 카더라! 경찰이 김주열이 눈에 포탄을 박아 죽였다 카더라!”
“어매! 어디서...?”
“바다 속에 돌을 묶어 던져놓았는데 파도에 밀려 나왔다 카더라!”
“뭐라꼬? 돌에 묶어 수장을 했다꼬....?”
분노한 시민들은 김주열의 시체가 안치된 도립병원으로 몰려들었다. 삽시간에 1천명으로 불어난 시민들은 거리 행진을 시작하였다.
“주열이를 살려내라!”
“내 자식을 돌려다오!”
자식을 가진 모든 부모들은 울고,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다. 3.15 부정 선거 항의 시위 이후 이승만 정권의 야수적인 공산당 몰기 작업으로 한때 주춤했던 분노가 다시 폭발한 것이었다.
오후 6시 김주열의 소식을 듣고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 나왔다. 시위대는 마산경찰서를 비롯, 남성동, 북마산, 오동동, 중앙동, 신마산파출소를 향해 성난 파도처럼 몰려갔다. 이제 아무 두려움도 없었다. 자유당 인사들의 사무실은 물론이고, 시청에도 난입하여 그때까지 시청에 보관 중인 투표상자를 꺼내 불사르고 서류뭉치를 집어던졌다.
처음에 그 기세에 겁먹은 경찰은 경찰서에 집결하여 총을 들고 겹겹으로 방어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부산도경에서 지원병력이 도착하자 마침내 시청과 경찰서를 중심으로 밤 9시 35분부터 일제히 사격을 하기 시작하였다. 선두에 섰던 두 명이 금새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시위대에서 애국가가 흘러나왔다. 여자들은 ‘유관순 누나’와 ‘3.1절 노래’를 불렀고,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는 광복절 노래도 나왔다. 밤 10시 20분, 일시 발포를 중지한 경찰과 시위대는 새벽까지 소강상태로 대치하였다. 시위대는 연좌하여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구호를 외쳤다.
김주열 군의 등장으로 재점화된 4월 혁명의 전초전은 11일에 이어 12일, 13일까지 연사흘간 계속 이어졌다. 이번에도 학생들이 앞장을 섰다. 그들은 억수 같이 쏟아지는 빗속을 질서정연하게 행진을 하였다. 그리고는 태극기와 생화로 덮여 있는 김주열 군의 시체 앞에 묵례하고 해산하였다. 그러나 경찰은 시위에 참가한 학생 대표들을 찾아 가차없이 연행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내무장관과 법무차관은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늘 그렇듯 모든 민주화를 위한 양심적 항거를 공산분자의 책동으로 몰아나가는 담화문이었다.
“마산 사태의 배후조종에는 적색마수가 개재된 혐의가 있어 수사 중에 있으니 선량한 국민 여러분은 부화뇌동치 말 것이며, 앞으로 이런 사태가 계속되는 경우에는 부득이 국법에 의해 엄중 처리할 것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전국 각급 학교에 등교 중지령을 내리고, 반공검사인 오제도와 조인구 치안국장, 하갑청 육군 특무부대장 3인으로 이른바 ‘대공 3부 합동수사위원화’를 구성하여 마산에 상주하면서 “적색분자의 준동 혐의를 과학적으로 수사할 방침”이라고 발표했다. ‘과학적인 수사 방침’에 따라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벌어졌다. 얼마나 잡아들였는지 경찰서에 모두 수용할 수 없어 마산역 화물칸에 까지 수용해야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들의 좌익 폭동 몰아가기가 그렇게 순조롭지 만은 않았다. 이미 속으로 곪을대로 곪은 이승만 자유당 정권에 환멸을 느낀 국민들의 저항은 마산을 넘어 전국으로 줄기차게 뻗어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웃한 부산은 물론이고, 전주, 청주, 인천, 진주 등지로 번져간 불길은 이제 바야흐로 대한민국의 심장부인 서울로 옮겨갈 본격적인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서울의 무거운 침묵을 맨 먼저 깬 것은 고려대학생이었다.
4월 18일. 경찰과 학교 측의 방해를 뚫고 점심 무렵, 인촌 동상 앞에 모인 3천여 명의 학생들은 신입생 환영회에 쓰려고 미리 준비했던 ‘고대’라고 쓰인 수건을 머리에 동여매고 선언문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고대학생 제군! 이제 질식할 듯한 기성독재의 최후의 발악은 바야흐로 전체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 그러기에 역사의 생생한 예언자적 사명을 띤 우리 청년학도는 이 이상 역류하는 피의 분노를 억제할 수가 없다. 만약 이런 극단의 악덕과 패륜을 포용하고 있는 이 탁류의 역사를 정화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후세의 영원한 저주를 면치 못하리라. ... 우리 고대는 과거 일제하에서는 항일 투쟁의 총본산이었으며 해방 후에는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사수하기 위하여 멸공전선의 전위적 대열에 섰으나 오늘은 진정한 민주 이념의 쟁취를 위한 반항의 봉화를 높이 들어야하겠다. 고대학생 제군! 우리는 청년학도만이 진정한 민주 역사 창조의 역군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여 총궐기하자!“
선언문을 읽은 고려대생 3천여 명은 스크럼을 짜고 교문을 뛰쳐나와 태평동에 있는 국회의사당을 향해 달렸다. 이들은 대광고와 안암동 로타리에서 지키고 있던 경찰의 완강한 제지를 받고 일시 흩어지는 듯 했으나 곧 다시 삼삼오오 골목을 빠져나와 국회의사당 앞에 속속 집결하였다.
오후 4시 유진오 고대 총장이 나왔다. 그리고 총장과 내무장관 사이에 담판이 벌어져 연행학생을 전원 석방하기로 약속하였다. 연행된 동료학생들이 나오자 학생들은 해산하기로 하고 오후 6시경, 백차와 보도 차량의 선도를 받으며 질서 정연하게 학교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역사는 언제나 뜻하지 않는 곳에서 반전을 기다리고 있는 법이다.
청계천 4가 천일백화점을 앞을 지나려는 순간, 선도하던 백차가 옆으로 빠지면서 갑자기 난데없이 도로 옆 골목에서 쇠망치, 몽둥이, 벽돌, 쇠사슬 등을 든 한 무리의 건장한 괴한들이 쏟아져 나와 학생을 향해 닥치는대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억, 악, 하는 비명소리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학생들....
“깡패들이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도처에 중상자들이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그들은 자유당 시절 정치 깡패로 이름을 날렸던 임화수 휘하의 반공청년단 종로구단 특별단부 소속 조직 폭력배들이었다.
이 습격 사건은 그때까지만 해도 신사적인 시위를 생각하였던 학생들의 가슴에 분노의 불길을 당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4월 19일 아침 조간신문을 받아본 학생과 시민들은 경악과 분노에 휩싸였다.
“깡패들이 학생들을 습격하다니!”
그렇지 않아도 길고 긴 자유당 정권의 전횡에 혐오와 격분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보라! 갖가지 부정과 사회악이 민족정기의 심판을 받을 때는 왔다! 이제 우리는 대학의 양심으로 일어서노니 총칼로 저지 말라. 우리는 살아있다. 동료의 무참한 살상 앞에 안일만을 탐할소냐! 한숨만 쉴소냐! 학도여, 우리 모두 정의를 위하여 총궐기하자!”
신설동에 있던 대광고등학교 학생 일천여명이 먼저 교문을 박차고 나와 혜화동 쪽에서 나왔다. 뒤이어 서울대 문리대, 법대, 미대, 상대, 치대, 수의대, 치의대, 사대 학생들이 몰려나와 합류하였고, 고려대, 성균관대, 건국대 대학생들도 몰려나왔다. 신촌 쪽에서는 연세대, 홍대, 경기대, 이화여대, 숙명여대 등이 그리고 단국대, 국민대, 서라벌 예대도 나왔다. 중앙대도 한강 인도교를 넘어 시내로 진출하였다. 동국대 시위대는 국회의사당 앞에 모여 있다가 누군가의 “경무대로 가자!“ 는 제창 소리에 중앙청을 향해 행진을 시작하였다. 어느 틈엔가 시위대의 구호도 더 이상 부정선거 규탄이 아니라 ”이승만은 하야하라!“ ”독재정권 물러가라!“로 바뀌었다. 시위대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불어나 정오 무렵에는 서울역에서 중앙청, 동대문에서 신촌까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시위대의 물결은 권부의 심장 경무대로 향했다. 경무대에는 곽영주 경호과장의 지휘 아래 무장 경찰이 철통같은 방어진을 치고 있었다. 오후 1시 40분, 소방차를 앞세운 시위대와 경찰의 간격이 불과 10미터로 압축된 순간, 마침내 경찰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기 시작했다. ‘피의 화요일’ 대학살이 시작된 것이었다. 비명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7, 8구의 시체가 나뒹굴었다. 그러나 정의에 불타는 젊은 사자들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동성고의 고교생들은 교모 턱끈을 걸고 맨몸으로 돌진하였고, 동국대, 연세대 등의 대학생들도 어린 후배들의 죽음 앞에 필사적으로 맞섰다. 이날 경무대 앞 죽음의 행진은 오후 5시까지 계속되었다. 그 자리에서 21명이 죽고, 172명이 중상을 입었다.
피의 제전은 경무대 앞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중앙청 옆 무기고 앞길에서 연좌시위를 하던 학생들도 무차별 사격에 8명이 목숨을 잃었고, 부정선거의 원흉인 이기붕의 집 앞에서도 2명의 학생이 흉탄에 쓰러졌다. 그 와중에 정권의 나팔수 노릇을 하던 서울신문사가 불타고, 반공청년단 깡패들의 소굴인 반공회관도 불길에 휩싸였다. 거리엔 사상자를 나르는 엠뷰란스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내달리고 있었다. 병원 앞에는 헌혈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오후 3시, 마침내 더 이상 버틸 힘이 사라진 이승만 독재정권은 마지막 발악처럼 서울 일원과 뒤이어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계엄사령관은 육군 참모총장 송요찬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송요찬은 비교적 중립적인 군인이었다. 그는 더 이상 무고하게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탱크를 배치하고 무장한 군인들이 질서유지에 나섰지만 어떤 과격한 행동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날 부산에서도 발포가 있어 19명의 희생이 났고, 대구, 대전, 전주, 청주, 인천, 군산, 포항, 춘천, 영주 등 전국에서 반독재 항거가 벌어졌다.
이 피의 강물 속에서도 그러나 이승만은 여전히 물러갈 생각이 없었다. 이승만과 그 일당들은 이기붕을 사퇴시키는 선에서 어떻게든 현재의 권력을 유지하려고 획책하였다. 그런 그들의 음모에 뒤통수를 때린 것은 그동안 젊은 학생들의 희생을 바라만 보고 있었던 교수들이었다. 4월 25일, 2백 58명의 교수들은 시국선언문을 낭송한 후 종로를 지나 국회의사당까지 행진을 하였다. 교수단의 시위는 엄청난 반향을 몰고 왔다.
그러나 이승만은 끈질겼다. 일부 국무위원들을 교체하고 비상계엄을 확대해 선포하였다. 그러나 시민과 군인은 원래부터 싸울 마음이 없었다. 세종로에 서있던 계엄군의 탱크 위에 소년들이 새까맣게 올라탔고, 군인들은 아무도 그런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이승만이 마지막으로 꿈꾸었던 총칼에 의한 지배가 더 이상 실현불가능하게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