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Embed 퍼가기
하단의 내용을 복사해서 퍼가세요.
URL 퍼가기
하단의 내용을 복사해서 퍼가세요.
이메일 공유
불이 나면 누구고 나와서 꺼야한다.‘민주수호국민협의회’와 법정스님
1971년, 따뜻한 봄바람이 한반도의 남쪽에서 멀리 북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무렵인 4월. 법정스님은 혼자 서울로 가는 버스에 올라 있었다.
봄이 왔다지만 봄 같지가 않았다. 얼마 전 함석헌 선생과 장준하 선생이 모인 ‘씨알의 소리’ 편집회의에서 들은 소리 때문이었다. 삼선개헌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위해 조만간 아무래도 모종의 조처를 할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그럴 리가 있을까요? 겨우 어거지로 삼선개헌을 한 지가 언제라고....”
“그러니까. 무서운 사람이지요.”
법정 스님의 말에 장준하 선생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4.19 민주혁명의 고귀한 희생을 짓밟고 군인들을 동원해 한강을 넘어왔을 때부터 이미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끝장 난 것이나 다름없었지요. 그래도 지금까진 눈치를 봐서 해왔지만 이제는 내놓고 하니 야단났지요. 이후락이란 자가 중앙정보부를 책임지면서 감시와 통제가 전에 없이 강화되었구요.”
장준하 선생이 특유의 열정으로 계속해서 말했다. 하얗게 센 머리에 긴 수염을 기른 함석헌 선생은 눈을 감고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곧 있을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후보인 김대중을 이기고 나면 이제 더 이상 선거 같은 걸 치르지 않고 종신 집권을 하는 방법을 모색하려고 할 거예요.”
“그러면.....?”
법정 스님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끝을 흐렸다.
“그야 아직 알 수 없지만…… 모종의 음모가 꾸며지고 있는 건 사실이에요.”
장준하 선생의 그 날 발언에서 나온 모종의 음모는 그 다음 해 이른 바 ‘10월 유신’으로 드러나게 되었지만 당시엔 누구도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어쨌거나 대통령 박정희는 곧 있을 대통령 선거를 넘어 장기 집권을 위해 몇 수 멀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4. 19 혁명의 희생 위에 겨우 싹이 트기 시작했던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철저한 유린을 의미했다.
1971년 4월의 봄은 바로 그런 어두운 분위기에서 출발하고 있었고, 서울로 급히 버스를 타고 올라가는 법정스님의 마음에 무거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박정희의 무서운 음모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각계의 움직임이 있었다. 함석헌 선생을 비롯해 재야 변호사로 양심과 용기의 상징인 이병린 변호사, 신교계의 큰 어른인 한신대의 김재준 목사, 당대의 사학자인 천관우 선생이 주축이 되고, 그보다 한 세대 젊은 소설가 이호철, 남정현, 조향록 목사, 김정례, 한철하, 계훈제 등이 운영 위원이 되었는데 법정 스님 역시 여기에 불교계를 대표해 운영위원으로 참가해달라는 연락을 받았던 것이다.
연락을 받은 스님은 한동안 망설였다.
청정수행이 기본인 출가사문으로 현실에 몸을 담는 것이 과연 옳은가, 무소유를 외치면서 진흙창 같은 세상에 나아가는 것이 과연 바른 길인가, 하는 질문이 밤새 끊이질 않고 일어났기 때문이다. 어차피 정치는 정치일 뿐, 맑음과는 거리가 먼 동네이니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그러나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을 생명으로 아는 승려가 지금 중생이 큰 병을 앓고 고통을 받고 있는데 돌아앉아 수행만 한다는 게 또한 자가당착이었다. 후일 법정 스님은 어느 글에선가 이렇게 썼다.
“이웃에 불이 났을 때 소방관이고 누구고 할 것 없이 모두 나와서 급한 불을 꺼야 한다. 그러고 나서 일단 불이 잡힌 뒤에는 각자 원위치로 돌아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몫을 다해야 한다.”
지금은 누가 뭐래도 불이 난 상황이었다. 누구라도 나서지 않으면 부엌의 부지깽이라도 나서야했고, 누구라도 외치지 않으면 광야의 돌멩이라도 외쳐야할 때였다. 법정 스님은 마음이 정리되자 지체없이 바랑을 쌌고, 다음날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던 것이다.
1971년 4월 19일. 4.19혁명이 터진 지 꼭 11년 째 되는 해의 4.19 날이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이승만 독재에 항거해 일어났던 4.19혁명의 의미를 애써 축소하여, 혁명이란 용어도 ‘의거’라는 말로 대신 사용하게 하고, 일체의 행사도 없이 지나가기 일쑤였다.
바로 그날 법정 스님을 비롯해 서울 YMCA에 모인 각계 인사들은 4.19 행사와 함께 천관우 선생이 기초해온 ‘민주수호국민협의회’ 회칙을 낭독하고 공식적으로 단체를 발족시켰다. 이 나라 최초의 재야 민주단체가 탄생하였던 것이다. 민주수호국민협의회는 그해 1971년을 ‘민주수호의 해’로 정하고 국민들과 함께 박정희 정권의 장기 집권 계획에 저항할 것을 결의하였다. 민주수호국민협의회는 강연회, 좌담회, 성명서 발표, 인권탄압 사례조사, 공명선거를 위한 선거참관인단 구성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뒤를 이어 민주수호청년협의회 등 각종 반독재 시민단체가 조직되었다.
하지만 71년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길 중에서 가장 험한 가시밭길이 앞에 놓여있을 때였다. 이후 국민협의회에 제2기 이사로 참가했던 리영희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1971년이라는 해는 우리 한국사회가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암담한 암흑의 굴속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가고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정치적 암흑 속에서 빠져 들어간 해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해요. 이 해에 박정희는 영구 집권을 위해서 제7대 대통령 선거를 폭력으로 강행하여, 야당의 김대중 후보를 꺾고 당선됨과 동시에 국가를 온통 공포 분위기로 몰고 갔어요. 그 방법으로 노동자, 노동운동, 학생운동의 자유와 국민의 정치적 권리 일체를 박탈하는 소위 ‘국가보안법’을 발동했어. 이어서 실시한 국회의원 선거도 공포분위기 속에서 다수 의석을 얻어낸 박정희는 영구집권에 필요한 모든 정치적 법률들을 만들어 버렸지요.”
1971년 12월 6일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다.
1972년 8월 15일 오후 2시쯤 국민협의회 대표인 이병린과 장준하 등 운영위원들이 대통령에게 보내는 청원서와 건의서를 우송하러 안국동우체국으로 가던 중 종로경찰서에 연행되고 유인물은 모두 압수되었다. 그때 이병린 변호사는 중앙정보부로 넘겨졌는데, 정보부에 다녀온 후로 심리적 충격이 커 오랫동안 고통을 겪었고 약 6개월가량 야당 지도자들과 접촉을 끊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다시 활동을 시작하여 긴급조치 위반 구속자들의 변론을 하고, 그후 1974년 11월 27일에는 유신체제를 정면으로 반대하는 ‘민주회복국민회의 선언문’ 에 앞장섰다가 구속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때 법정스님 역시 재야 민주화 집회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늘 책이 들려 있었다. 독서가이며, 문학도이기도 했던 스님은 이미 당시에 맑고 잔잔한 산문으로 대중들의 가슴 깊이 파고들고 있었다. 법정 스님이 얼마나 철저한 독서가였던가 하면 한번은 재야집회에 참가했다가 종로서에 끌려갔다 나오는데, 이호철 등 당시에 같이 갔던 사람들이 흩어져 갈 때 스님은 혼자 서점에 들러 산문책을 사더라는 이야기도 있고, 주례사로 꼭 한 달에 산문집 두 권과 시집 한 권을 읽으라고 당부하셨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현실에 맞서면서도 수행과 독서, 집필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이다.
불 난 집 같았던 1970년대의 현실 앞에서 법정 스님이 가장 아팠고, 그 후로도 내내 애석해하셨던 일은 이른바 인혁당사건이었다. 유신 헌법이 발효되자 학생, 시민, 민주계 인사 등의 유신철폐 개헌서명운동이 일어났고, 이에 박정희 정권은 끔찍한 고문과 함께 1975년, 이른바 ‘2차 인혁당사건’ (일명 인혁당재건위사건)이라 불리는 정치 조작극을 벌인다. 도예종 등 사회주의 성향을 보이는 한 무리의 인사들을 국가전복 기도 혐의로 구속, 재판에 회부한 것이다. 그들에게 사형이 언도되고 대법원 상고가 기각되자 채 20시간도 지나지 않은 바로 그 이튿날 여덟 사람 전원을 사형시키는 사법사상 유래가 없었던 만행을 저질렀다. 이를 목격한 법정 스님은 큰 충격을 받았다.
“죄 없는 그들을 우리가 죽인 거나 다름이 없다고 자책했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독재자들에게 조작극이라고 가장 아픈 곳을 찌르자, 보란 듯이 서둘러 사형을 집행한 것이다.”
다시 1971년으로 돌아가 보자.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참여 인사들을 중심으로 이 해 10월 중순 ‘64인 지식인선언’을 발표하였다. 선언문에서 총통제 분쇄, 학원탄압 중지, 구속학생 석방, 대학생 강제 입영 중단, 대학점령 군인 철수 등을 촉구했다. 리영희 선생 역시 이 선언문에 참여했다가 신문사에서 해직되었다. 국민들의 저항과 민주 진영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군사정권은 그들의 계획을 착착 차질없이 진행하고 있었고, 드디어 다음 해 10월, 김대중 후보가 대선 중에 공언했던 대로, 그리고 ‘64인 선언문’과 장준하 선생이 《씨알의 소리》 편집회의에서 예언했던 대로 박정희의 종신제 집권을 위한 이른바 ‘10월유신’을 선포하였다. 총통제란 말만 빠져있을 뿐이었다.
‘민주수호국민협의회’는 유신시대를 맞아 1974년 11월 27일 ‘민주회복국민회의’로 거듭날 때까지 숨 가쁜 역사의 오르막길을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때까지 늘 일선에 있었던 법정스님은 75년 10월, 거듭 털고 일어서는 각오로 미련 없이 서울을 등지고 송광사의 토굴로 돌아갔다. 불은 꺼지지 않았지만 무슨 운동이든지 개인 인격형성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 무엇 때문에 출가수행자가 되었는가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부도만 남아있던 송광사 불일암 터에 토굴을 다시 짓고 홀로 있으면서도 대중과 함께 수행하듯 철저한 자기 질서 속에 독서와 수행에 힘썼다. 그 무렵에 발간한 저서가 《무소유》였다.
법정 스님은 그곳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필요에 따라 소유한다. 하지만 그 소유 때문에 마음이 쓰이게 된다. 따라서 무엇을 갖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에 얽매이는 일, 그러므로 많이 가지면 그만큼 많이 얽매이는 것이다. 무소유는 단순히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을 뜻한다.”
군사독재 정권의 만행이 불이라도 난 것처럼 온통 이 나라를 태우고 있을 때 수행처에서 나와 소방관이고자 했던 그는 이렇게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함석헌, 김재준, 이병린, 천관우, 장준하, 리영희 등과 함께 했던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가 그의 또 다른 수행처요, 그들이 선지식이었음 또한 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