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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대의 죽음과 1991년 봄 투쟁-“ 젊은이들의 피를 먹고 자라나는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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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통령의 명령, 범죄와의 전쟁

“잘 들어라! 이것은 각하의 지시다!”

국방색 전투복을 입은 소대장은 지휘봉을 흔들며 말했다.

“지난 1987년 대통령 직선제로 국민의 뜻에 의해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되어 민주주의가 이뤄졌음에도 불순세력에 의한 반정부시위는 나날이 폭력화되고 있다. 이에 대통령 각하께서는 폭력시위를 근절하기 위해 강력한 전쟁을 선포하셨음을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최일선에서 각하의 명령을 수행하는 우리에게도 새로운 지침이 내려왔다.”

소대장은 지휘봉으로 칠판을 가리켰다. 이동식 소형 백색 칠판에는 시위대에 대한 진압과 체포 방법에 대한 새로운 지시사항들이 적혀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 전투경찰대는 시위를 진압할 때 일보전진, 일보후퇴를 반복하며 시위대의 자진해산을 유도해 왔다. 그러나 새로운 지침에 따라 앞으로 후퇴개념은 없다. 무조건 전진공격으로 시위를 강제 해산시키도록 한다. 알겠나?”

“넷!”

간편한 청바지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머리에는 흰 안전모를 쓴 사복 체포조 소대원들은 일제히 큰 소리로 대답했다. 

소대장은 지휘봉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

“특히 우리 사복 체포조는 지금까지 정복중대의 보조역할로 시위대가 무너질 때 돌진해 주동자를 체포하는 역할을 해왔으나 앞으로는 우리가 맨 앞에서 시위진압을 책임진다. 화염병과 돌멩이가 날아와도 우리는 무조건 돌진해 닥치는 대로 적을 제압한다.”

소대장은 말하면서도 소대원들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방석복과 방패도 없이 육탄으로 돌격하는 일이 위험한 것은 안다. 이에 따라 우리 사복체포조에는 곧 한 손으로 들고 다닐 수 있는 소형 방패가 지급될 것이다. 우선 짧은 진압봉대신 일 미터짜리 진압봉은 이미 지급했다. 새 진압봉은 모두 지급 받았나?”

“네!”

소대원들의 대답은 방금 전보다 한결 낮았다. 소대장은 버럭 고함을 치며 지휘봉으로 칠판을 두드렸다.

“복창소리가 그것밖에 안 나오나? 진압 현장에서 겁을 먹고 우물쭈물하는 놈이 하나라도 발각되면 소대원 전체가 혹독한 기압을 받고 고참들의 휴가는 취소될 것이다!”

소대장은 한바탕 겁을 준 다음에는 다시 달래기에 들어갔다.

“대신 지금까지는 시위자에게 부상을 입히지 않도록 때리는 부위를 제한했으나 앞으로는 머리든 얼굴이든 진압봉을 아무 제한 없이 사용해도 좋다. 방패 역시 방어용으로만 썼지만 앞으로는 방패로 시위대를 찍어도 좋다. 무조건 해산시키고 체포해라! 모든 책임은 상부에서 진다. 알았나?”

“넷!”

소대원들의 대답소리는 다시 높아졌다. 소대장은 흡족한 표정으로 오늘 나갈 시위 현장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전두환과 함께 군사쿠데타의 주역이던 노태우는 6월항쟁으로 쟁취된 대통령 직선제에 따라 민정당 후보로 출마하면서 말했다.

“지난날 인권시비가 일어날 때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내 아들 내 딸과 같은 젊은이들이, 그것도 조국의 내일을 염려하는 젊은이들이 고문을 받았다는 보도를 접했을 때 말할 수 없이 부끄러웠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이 되자 ‘조국을 염려하는 젊은이들’은 ‘좌경폭력세력’으로 바뀌었다.

“저는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법과 무질서를 바로 잡을 것입니다. 좌경폭력 세력에 대한 법집행을 소홀히 하는 공직자는 엄중히 문책 할 것이며, 법 집행과정에서 소신껏 일하다가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히 정상참작을 할 것입니다.”

이에 따라 청바지와 운동화의 불량스런 옷차림을 한 젊은이들이 도시의 지하도 입구나 공공건물 앞에는 짝지어 버텨 서서 시민들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시위학생들을 골목 끝까지 뒤 쫒아가 뒷덜미를 낚아채며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는 광경은 국민들에게 익숙해졌다. 흰 안전모를 썼다고 해서 백골단이라 불리던 사복 체포조였다. 

대통령의 보호 아래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는 백골단에 의한 사고는 예견된 것이었다.

2. 빼앗긴 영혼

1991년 4월 26일 오후 5시 경, 서울 남가좌동 명지대학교 운동장에서는 4백여 명의 대학생들이 두 시간째 집회를 열고 있었다. 한 달 전부터 시작된 등록금 인상 거부투쟁이었다. 이 날은 특히 전날 총학생회장이 경찰에 연행된 데 대한 항의가 높았다.

“총학생회장을 즉각 석방하라!”

“재단전입금을 늘리고, 등록금을 민주적으로 결정하라!”

정치투쟁이라고 할 수 없는, 평범한 학내집회였다. 등록금의 지나친 인상에 항의하는 것일뿐, 어디에도 정부를 비난하거나 체제를 비판하는 구호는 없었다. 그러나 군사정권의 연장인 노태우정권은 이조차도 용납하지 않았다. 경찰은 가스살포차 3대와 사복전경 10개 중대 1,200명을 동원하여 학교 주변을 에워싸고 교내 진입을 예고하고 있었다. 

이에 선봉대로 뽑힌 십여 명의 학생들이 교문 밖 50미터까지 진출해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경찰에 경고를 시작했다. 경찰의 진입 시간을 조금이라도 늦춰보려는 시도였다.

열아홉 살의 애띤 남학생 하나가 교문을 나선 것은 선봉대의 투석이 시작된 직후였다. 입학한 지 이제 두 달째인 경제학과 신입생 강경대였다. 그의 손에는 화염병도 돌도 들려있지 않았다. 아직 대학생활에 채 적응하지도 못한 그에게 선배들은 경찰의 교내 진입이 시작되면 운동장으로 달려와 알려달라고 부탁했을 뿐이었다. 

어머니를 닮아 네모지고 통통한 얼굴을 한 강경대는 고지식할 정도로 선량한 학생이었다. 언젠가 아버지가 ‘우리 아들 고추 얼마나 컸는가 보자’하고 농담을 하자 진담으로 알아듣고 바지를 훌렁 벗어 보일 정도로 착한 아들이었다. 순하고 겁 많은 그였지만 선배들의 부탁대로 위험한 교문 밖에 나선 것이다. 

강경대가 명성서적 골목에서 백골단이 몰려나오는 모습을 발견한 것은 5시 10분경이었다. 선봉대를 뒤에서 포위해 체포하려는 것이었다. 긴 쇠파이프를 든 전경들은 사과탄이라 불리던 휴대용 최루탄을 꺼내 들고 돌격을 준비했다. 상황을 깨달은 강경대는 한 발이라도 먼저 달려가 선봉대 선배들을 피신시키기 위해 뛰기 시작했다.

돌연한 상황에 몇몇 사복체포조가 방향을 틀어 강경대를 잡으러 달려왔다. 위기에 몰린 강경대는 학교로 돌아가려 했으나 교문 쪽 퇴로는 이미 막혀 있었다. 급한 대로 담장을 뛰어넘기 위해 담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담장에 매달린 순간 달려온 체포조가 옷을 잡아 끌어내렸다.

“이 새끼 어딜 도망가?”

순식간에 다섯 명의 체포조가 그를 둘러쌌다. 전경들은 제각기 들고 있던 긴 쇠파이프와 진압봉으로 무자비하게 내리치기 시작했다. ‘윙윙’ 소리를 내며 날아간 흉기가 가슴, 어깨, 팔, 다리, 허벅지 할 것 없이 작열하며 핏줄이 터지고 살점이 찢어지는 소리를 냈다. 불과 몇 분 사이에 수십 대를 두들겨 맞은 강경대는 대동맥이 파열되는 등 온몸에 깊은 상처를 입고 쓰러져 버렸다. 전경들은 그가 정신을 잃은 것을 확인하고서야 매질을 멈추고 그대로 버려둔 채 다른 학생들을 잡기 위해 최루탄과 화염병 연기로 자욱한 교문 앞으로 사라졌다.

“학생이 쓰러졌다!”

뒤늦게 달려온 학생들이 쓰러진 강경대를 안아 인근 성가병원으로 옮겼다. 그러나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사망원인은 심낭혈종이었다.

박종철 고문치사가 6월항쟁을 불러일으킨 지 겨우 4년만이었다. 수많은 시민들이 지켜보는 대낮에 전경들이 어린 학생을 두들겨 패 즉사시킨 사건은 또 다시 사회를 뒤흔들었다.

3. 죽어가는 젊은이들

강경대가 사망한 다음날, 연세대에 모인 1만여 명의 대학생들은 폭력살인을 지시한 노태우 정권퇴진 운동을 천명했다. 시민단체들과 민주인사들도 제각기 긴급회의를 열고 군사독재로의 회귀를 막기 위한 전면적인 투쟁을 선언했다.

또 다시 민주주의가 짓밟힌다는 위기감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이틀 후인 4월 29일, 전남대 여학생 박승희가 청년학도들의 봉기를 호소하며 분신했다. 이에 다시 이틀 후에는 안동대 김영균이 분신하고 다시 이틀 후인 5월 3일에는 경원대 천세용이 옥상에서 분신한 채 투신해 사망했다.

강경대 치사사건과 잇단 분신사태는 6월항쟁 이후 잠잠했던 민심에 다시 불을 붙였다. 5월 4일에 열린 ‘백골단 해체와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 결의대회’에는 전국적으로 27만 명이 참여했다. 서울과 부산 시가지는 밤늦게까지 최루탄과 화염병 연기로 자욱했다.

여기에 한진중공업 박창수 노조위원장이 5월 6일 의문의 죽음으로 발견되자 안기부에 의한 타살이라는 소문이 번져나가 더욱 분노를 일으켰다. 잇달아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전남대 윤용하가 분신하였고 성균관대 여학생 김귀정이 시위도중 경찰에 쫒기다가 사망하는 사건이 터지면서 상황은 걷잡기 힘들게 되었다. 5월 9일에는 전국에서 55만 명이 집회에 참가하는 등 6월항쟁이 재현되는 듯 했다.

사태는 노태우 대통령이 직접 가해자들을 구속시키고 책임자들을 해임시키면서야 진정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정원식 국무총리가 학생들에게 계란세례를 맞는 장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학생들을 패륜아로 몰아간 영향도 있었다. 또한 분신한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의 유서를 다른 사람이 써주었다고 매도함으로서 여론을 돌린 것도 작용했다. 

두 달 가까이 계속된 전국적인 시위는 눈에 보이는 성과는 얻지 못한 채 끝났다. 그러나 이 싸움은 군사정권의 잔불을 꺼버리는 역할을 하였다. 이 대규모 투쟁을 통해 한국의 민주주의는 한결 진일보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전남 보성고교 김철수가 분신하는 등 두 달 간 사망한 젊은이들의 숫자는 13명에 이르렀다. 언제나 그랬듯이,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젊은이들의 피를 먹고 자라난 것이다.

글 안재성

1989년 장편소설 <파업>으로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이후 대표작으로 <사랑의 조건>, <황금이삭>, <경성트로이카>, <연안행>,등의 장편소설과 <이현상 평전>, <박헌영 평전> 등의 인물평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