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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북사태의 진실, 동원탄좌시위조사보고서

1980년 5.18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모르는 이들이 드물지만, 같은 시기 강원도 사북에서 일어난 광부들의 저항과 투쟁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그나마 사북에서 발생한 사건을 단지 술 취한 광부들이 일으킨 ‘광부들의 폭동’, ‘공포에 휩싸인 탄광’, ‘유혈 난동’으로만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이른바 사북사태로 불리는 이 사건은 당시에는 폭동이었으나 지금은 사북항쟁으로 명예회복을 하였다. 

사북항쟁은 1980년 4월 21일부터 24일까지 4일에 걸쳐 국내 최대의 민영탄광인 강원도 정선군 동원탄좌 사북영업소에서 광부와 그 가족 6,000여 명이 어용노조와 열악한 노동환경에 항거하여 일어난 사건이다.

사북에서의 사건이 이처럼 폭동과 난동으로 기억되는 데에는 언론의 공(?)이 컸다고 할 것이다. 당시 신문은 사북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은 뒤로 한 채, 광부의 폭력성에 초점을 맞춰 이들의 저항을 체제를 위협하는 행위로 부각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언론은 그들의 저항을 동정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지는 몰라도 ‘폭력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그럴듯한 논리로 불합리한 현실을 두둔하려고만 하였던 것이다.

사북의 실상을 세상에 알린 <동원탄좌 시위 조사보고서>는 먼저 그동안 언론에서 다루지 않았던 광부들의 비참한 삶을 세상에 알리고자 하였다. 

이른바 ‘문둥이 다음이 광부’라는 표현처럼 1960~70년대 경제개발논리 속에서 철저히 소외되었던 광부들의 생활이 고스란히 드러난 <동원탄좌 시위 조사보고서>는 사북의 진실을 알리는 소중한 자료가 되었다.

그러나 사북사건는 언론에서 떠들어대는 것처럼 단순한 광부들의 우발적인 폭동만은 아니었다. 정권유지를 위해 외국독점자본과 결탁하여 석유재벌로부터 수백만 불의 정치자금을 받고 이를 보상하기 위해 값싼 에너지 공급이라는 명목으로 저탄가 정책을 유지해 온 박정희 정권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 ‘탄광’이라는 지역적 특수성과 결합하여 폭발된 결과였다. 

편향된 언론과는 달리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KCAO)에서는 사건의 진실에 사실적으로 접근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는 두 차례에 걸쳐 사북에 조사단을 파견하였다. 조사단은 현지에 머물면서 동원탄좌 광부들과 광범위한 대화를 통해 사건의 경위를 조사, 발표하였다. 

작업은 3교대에 의해 하루 여덟 시간, 그러나 그들은 똑바로 설 수도 없는 갱 속을 400m 이상 들어가, 햇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암흑 속에서 곡괭이질을 한다. 30~40도의 지열 속에서 일을 했지만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임금을 받았다.  

언제 어떻게 닥쳐올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를 안고 작업장에 들어가는 광부의 표정은 우울하며, 일과가 끝나면 오늘도 살았다는 안도감에 술집을 찾는다. 

그리고 사북사건은 광부들의 우발적인 ‘폭동’이 아닌 ‘항거’라는 점을 명확히 하였다. 전국 각지의 농촌에서 살다 죽지 못해 정든 고향을 버리고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광산촌에 모여든 광부들은 그동안 대기업과 어용노조에 의해 이중의 착취를 당하면서도 못 가지고, 못 배운 것을 죄로 생각하면서 참아야만 했다. 보고서는 그렇게 인내하며 살아왔던 광부들이 왜 곡괭이와 몽둥이를 들고 사북의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었는지를 사건의 전개과정과 함께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와 함께 당시 공권력이 부재했던 4일 동안 사북은 일반에 알려진 것처럼 결코 ‘무법천지’가 아니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오로지 방어 목적과 최후수단으로서만 무기와 화약을 필요로 하였으며, 실제로 군이 투입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오히려 무기와 화약의 악용을 막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다.(중략) 방송이나 언론에서 표현하는 ‘무법천지’, ‘난동’, ‘유혈폭동’처럼 그들은 결코 난동을 부리거나 무법천지를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사북에서 광부들의 저항은 관제언론에서 지적한 것처럼 ‘정당화 될 수 없는 폭력’이 아닌 ‘민중의 정당방위’였음을 주장하고 있다. 

“그들의 요구는 정당하다. 그러나 그들이 폭력에 호소한 행위만은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다”라고 말하는 사이비 지식인들이 있으나, 이는 역사의 A, B, C도 모르는 철부지들이다. (중략) 수백 명의 무장기동대에 직면한 광부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길 뿐이었다. 이 무자비한 제도적 폭력 앞에 또다시 무릎을 꿇고 굴종의 삶을 감수하느냐, 아니면 죽음을 불사하고 맨주먹으로나마 끝까지 항거하느냐이다. 

사북 광산노동자들의 저항은 당시 언론에서 ‘막무가내의 지옥의 거리’라고 지적한 것처럼 무분별한 난동이 아니었다. 이들 광부들의 폭력은 난동 시 나타나는 무차별적인 폭력과는 엄격히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광부들의 폭력은 그동안 그들의 분노를 극도로 조장시켜 왔던 대상에 국한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광부들은 그 누구의 통제에도 따르지 않던 상황에서 무기고를 스스로 지키는 한편, 순찰대를 조직하여 치안유지에 힘썼던 것이다. 

이처럼 ‘동원탄좌 시위 조사보고서’는 사북의 진실을 알리려 했던 것만큼 세세하고 꼼꼼한 현실의 모습들이 자료가 되었다. 특히 수집된 자료 중 ‘사북항거의 배경과 경위’ 이란 제목에 수기로 쓴 것은 명확한 자료 출처가 나와 있진 않지만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가 두 차례 현장답사를 했을 때 광부들과의 면담을 기록한 것으로 추측된다.

4일 간에 걸쳤던 사북 광산노동자들의 저항은 별다른 성과 없이 일시적인 사건수습 차원에서 끝을 맺었다. 사북은 ‘폭동’이 일어났던 지역이라는 족쇄가 채워진 채 세월이 훌쩍 흘렀다. 그동안 세상의 부침과 함께 사북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석탄산업의 쇠퇴로 대부분의 광산은 폐광되었다. 광산 대신 들어선 강원랜드로 인해 사북은 이제 광산보다는 카지노로 더 유명한 곳이 되었다.

사북사건은 오랫동안 ‘폭동’이라는 오명을 벗어 내지 못하다가 사북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당시 사건의 주역이었던 이원갑, 신경 등이 중심이 되어 ‘사북노동항쟁 명예회복추진위원회(위원회)를 결성했다. 위원회는 2005년에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에 명예회복을 신청해 이원갑, 신경 등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을 받았다. 2008년 4월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당시 연행ㆍ구금된 관련자와 가족들에게 행해진 인권침해와 가혹행위에 대해 국가의 사과를 권고하였다. 그리고 2015년 2월 재심을 통해 이원갑과 신경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동원탄좌 시위 조사보고서’는 사북사태가 사북항쟁으로 불릴 수 있는 중요한 근거 자료가 되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