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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민주화와 인권을 향한 열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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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1월 16일 대통령 전두환은 국정연설에서 86․88을 위한 ‘큰 정치’로써 임기 내 개헌불가의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어 법무부는 헌법논의를 빙자한 범법행위에 대해 엄벌하겠다는 방침을 거듭 천명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움직임은 1983년 2·12 총선 후 본격화되기 시작한 직선제 개헌논의를 봉쇄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의 방침에도 불구하고 개헌논의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1986년 2월 4일 서울대학교에서 15개 대학 1천여 명이 모여 ‘파쇼헌법철폐투쟁대회 및 개헌서명운동 추진본부 결성식’을 개최하였고, 12일에는 신민당과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으로 ‘1천만 개헌서명운동’을 개시하기로 결정하였다. 3월 5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이 가맹 23개 단체와 각계 민주인사 303인의 이름으로 ‘군사독재 퇴진 촉구와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범국민 서명운동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개헌서명운동은 정권교체와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들의 잠재적 요구를 폭발시켰으며 온 국민의 정치적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러한 맥락으로 신민당은 3월 11일 ‘개헌추진위원회 서울지부 결성대회’를 시작으로 주요 도시에서 ‘개헌 현판식 대회’를 추진하였으며, 이 대회에는 직선제 개헌을 바라는 수많은 시민들이 참여하였다. 이와 더불어 지식인·종교인·교수들의 시국성명서가 발표되었고 이는 직선제 개헌의 당위성을 대중들에게 선전함과 동시에 직선제 개헌의 열기를 확신시키는 계기점이 되었다.

직선제 개헌을 통해 민주정부를 수립하고자 하는 열망은 해외에 거주하는 동포라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캐나다 밴쿠버에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활동하던 안영삼 선생은 <밴쿠버“개헌서명운동”을 돕는 모임>을 결성하고 한인 교회를 중심으로 개헌서명운동을 전개하였다. 86년 4월 19일 발표한 ‘한국의 민주화 개헌서명운동을 지지하면서’라는 성명서를 통해 안영삼 선생은 ‘우리 캐나다 한인은 모국에서 우리 부모형제가 벌리고 있는 “1천만인 개헌서명운동”이 유린된 인권을 회복하는 민주양심의 선언이며 국민이 직접자신의 정부와 지도자를 선택하는 민주화의 핵심이며 장차 민족통일에 접근하는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구국투쟁임을 확신하고 이 비폭력의 평화적 운동을 전폭 지지’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개헌서명운동이 순탄하게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4월 27일 각 교회별로 서명을 진행하기 위해 교회마다 서신을 발송하고 각 교회 목사와 전화를 통해 혹은 직접 만나서 협조를 요청하였으나 일부 교회가 교회 내에서의 정치활동을 원하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교회의 태도에 대해 안영삼 선생은 ‘일개 목사가 수많은 교인의 의사를 무시하고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곳이지 정치운동하는 곳이 아니라는 냉대에 바로 그 자신이 독재를 자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회개를 해야 할 것이라’고 비판하고 개헌청원서명운동을 계속해 나갈 의지를 밝혔다.

4월 21부터 27일까지 진행된 1차 서명을 통해 650명의 교민과 캐나다인들이 개헌청원서명에 동참하였다. <밴쿠버 “개헌서명운동”을 돕는 모임>은 5월 12일부터 15일까지 한국을 방문하는 브라이언 멀로니(Brian Mulroney) 연방수상에게 이 명단의 사본과 한국에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이 필요하며 방한 기간 동안 개헌문제를 제기할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 담겨진 서신을 전달하였다. 

이후 계속된 서명운동을 통해 2천여 명이 넘는 교민과 캐나다인들로부터 지지를 받아냈으며 명단 사본을 멀로니 연방수상에게 전달하는 작업을 계속 하였다. 또한 한국의 인권과 민주개혁에 대한 캐나다 정부의 관심과 한국정부에 대한 압력을 지속적으로 요청하였다.

고국에서 민주화의 열망이 들불처럼 일어났던 6월 항쟁동안 안영삼 선생을 비롯한 교민들은 6월 19일 <캐나다 벤쿠버 지역 조국민주화를 위한 철야기도회>를 열고 ‘조국민주화를 위한 시국선언’을 발표하였다. 성명서를 통해 참가자들은 ‘지난 4․13 개헌 유보조치는 민주화를 열망하는 온 국민과 해외동포에게 큰 실망을 주었으며 민주화를 염원하는 국민적 합의에 대한 기만이요 배신’이라면서 ‘「88올림픽」이나 「평화적 정권이양」이 개헌을 유보하는 이유가 될 수 없’으며 ‘우리 해외동포는 우리 민족이 처한 역사적 사명을 실천하는 현장에 동참할 것을 엄숙히 선언’하여 조국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표하였다.

개헌서명운동과 더불어 안영삼 선생이 캐나다에서 전개한 중요 활동으로 “광주의거 추모의 밤” 추진을 들 수 있다. 광주민중항쟁 5주년을 맞아 밴쿠버 한인사회에서는 처음으로 1985년 5월 18일 백여 명의 교민들이 모여 “광주의거 추모의 밤”행사를 가졌다. <광주의거를 생각하는 모임>이 주최한 추도식에서는 광주항쟁에 대한 기록영화를 상영하였으며 추모음악으로 윤이상의 “광주여 영원히”를 들었다.

안영삼 선생은 「민중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지난 5년간 누적되어온 양심상의 가책 때문에 더 이상 광주 시민들의 의거를 모른 채 할 수 없다는 많은 교민들의 소리가 높고, 또한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희생하고도 공산폭도라는 누명쓴 영령들의 원한을 우리 해외동포들도 풀어줄 의무가 있’다라고 추모식을 갖게 된 소회를 밝혔다.

“광주의거 추모의 밤”은 밴쿠버 한인사회가 광주희생자를 추모하고 한국의 민주화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모임을 결성하는 계기점이 되었다.

1982년 정치적 목적이 아닌 인간이 진실로 인간이 되는 세상을 위한 사람들의 모임으로 <한마당>이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한 안영삼 선생은 1986년에 들어서 ‘사회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키는데 도움이 되고자’ 민주화운동 소식지 『한마당』을 발간하였다. 8월 8일 발간된 제1호는 제1면에 김구의 「나의 소원」을 실으면서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김구 선생이 이 글을 발표했을 때만 해도 그의 이 사상은 독선적이며 세태의 순리에 역행하는 과오라는 오해를 벗을 길이 없었다. 그로부터 40년이 흐른 오늘날, 과연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김구 선생의 40년 예지와 그 경고가 4천만 민족의 가슴에 응어리 진다’라는 글로 조국의 민주화를 향한 마음을 담았다.

발간호는 민주헌법쟁취와 서승·서준식 형제 문제를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고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개헌정국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고 “민주헌법쟁취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민주헌법쟁취는 민중의 힘으로!”, “현행 군사독재헌법과 민주헌법은 어떻게 다른가?” 등의 기사를 통해 민주헌법에 의해 민주정부를 수립함으로써 자주적, 평화적 민족통일로 향하는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또한 서승·서준민 형제에 대한 호소문을 통해 전근대적인 반인권악법으로 고통 받고 있는 조국의 인권상황에 대해 비판하고 서승형제를 비롯한 정치범의 석방을 위한 교민사회의 지원을 강조하였다.

<한마당>은 1990년 2월, 1989년 방북 후 투옥된 <문익환 목사·문규현 신부·임수경양 석방을 위한 특별청원 서명운동>을 전개하였다. 2월 12일자 성명서에서 안영삼 선생은 ‘통일은 국내나 해외나를 막론하고 오천년 한겨레였던 우리민족의 꿈이요 희망이요 지상명제’라고 전제하고 ‘통일은 분단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짊어지는데 그 뜻이 있고, 또한 길이 있다’며 교민들의 동참을 호소하였다. 같은 날 발표한 ‘노태우 대통령 귀하’라는 글을 통해 ‘역사의 긴 안목에서 볼 때 문익환 목사와 문규현 신부와 임수경 양 등은 그 벽 허물기의 선구자들’이며 ‘우리 모두가 함께 질머져야 할 통일의 십자가를 그들이 지고 있’기에 이들의 조속한 석방을 특별청원 한다며 용단을 촉구하였다.

1991년 1월 특별청원 청원서를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낸 안영삼 선생은 6월 30일 신문광고를 통해 노태우 대통령에게 이들의 특별사면을 다시 한번 촉구하였다. 

일생을 조국의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헌신했던 안영삼 선생은 2002년 10월 ‘해외민주인사 초청 한마당’에 참석한 후 캐나다 현지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몇 십 년 만에 찾은 조국은 경제적으로 크게 발전했더군요. 그러나 제도적 장치로서의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으나 여전히 민주주의의 생활화가 안 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고국 방문의 감회를 밝혔다. 그는 인터뷰를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삶이 젊은 세대에게 희망을 안겨줄 수 있고 투쟁의 결과물로 얻은 민주화가 더욱 확실히 뿌리를 내릴 수 있다면 우리가 범한 역사적 오류는 더 이상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중략) 남겨진 과제들은 젊은 세대들의 몫이며 민주주의는 제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활화해야 하는 것이며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