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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 피해를 보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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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농촌은 돈에 화신이 들린 것 같아. 열대여섯 살 고사리 손들이 돈을 벌겠다고 도시로 나간다. 식모살이로, 공장으로 말이다..... 어린 자식은 돈을 벌겠다고 도시로 나갔으니 일손은 모자랄 것이고 제 아비 값싼 곡간에 자식 놈 값싼 노임이라 죽어라 빌어먹을 놈들 가난할 수밖에 , 이래도 농민은 게을러서 못사는 것일까? 곡가는 다른 물가에 영향이 크니 인상 할 수 없고, 농촌에서 사용하는 생활필수품은 날만 새면 올라가니 또 한번 가난해 질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1970년대 이후의 진보적 기독교 사회운동에 관한 고찰」중에서, 서영섭)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정책은 외향적으로는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그것은 우리사회의 일부분을 포기한 채 이루어낸 반쪽자리 성공이었다. 수출주도형 경제개발은 실제로 산업의 역군이라고 불렸던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희생을 담보로 한 정책이었다. 저임금을 위한 저농산물정책.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년 열두 달을 자식처럼 꼬박 돌보는 농작물이지만 그것이 그들의 삶을 풍족하게 만들어 주진 못했다. 형편없는 가격정책으로 인하여 그들에게 늘어나는 것은 거대한 농가부채 뿐이었다.

실제 1970년대 산업의 역군이라고 불렸던 어린 여공들 중 대다수가 농촌 출신이었다. 도시빈민층이라 일컬었던 빈민들 또한 더 이상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농민들이 대부분이었다.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길은 끊임없는 가난의 길로 그들을 인도해왔다. 산업화는 그들을 끊임없이 일할 수 있도록 만들었지만 배부르게 할 수는 없었다.

“협동으로 생산하여 공동으로 판매하자”, “피땀 흘려 지은 농사, 농협 통해 제값 받자” 

자본주의적 시장구조 속에서 농민을 보호하자는 농협의 1976년 가을 슬로건이다. 그러나 함평군고구마사건은 바로 농협의 무책임한 발언과 행동에서 시작되었다. 1976년 농협은 생산된 고구마를 전량 수매하기로 TV, 신문, 방송 등을 통해 약속하였다. 농협은 9월부터 P.D.P(농협수매전용) 포대를 미리 농가에 배포하여 농민들로 하여금 수매준비를 하도록 했다. 농민들은 농협의 약속을 믿었다. 농협의 공동판매를 통해 전년보다 17.4% 인상된 값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로 별도의 저장대책 없이 대부분 노변에 고구마를 야적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농협은 애초의 약속을 무시하고 일부 농가로부터 소량만을 수매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노변에 아무런 대책 없이 쌓여있던 고구마들은 썩어갔다. 초초해진 농민들 중 일부는 중간상인에게 헐값으로 팔거나 농협에 피해보상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이때 함평군 내 가톨릭농민회(이하 가농)는 ‘피해보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대책활동을 시작하였다. 대책위에서는 고구마 피해 조사에 착수하였고, 1976년 12월 30일 현재 4개 면, 1개 읍, 9개 마을, 160 농가를 조사한 결과 피해액이 309만원으로서 호당 평균 19,000원 정도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추산한 함평군의 총 피해액은 1억 4천여만 원에 달했다.

1977년 4월 가농 전남연합회는 각계에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유인물을 보내거나 사건의 진상을 알리는 기도회를 여는 등 지속적으로 피해보상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농민들의 투쟁은 2년에 걸쳐 계속되었지만 농협과 정부의 무성의로 해결되지 않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농민들의 참여도 떨어지고 있었다. 긴 시간의 투쟁은 그렇지 않아도 생계가 곤란한 농민들에게 대부분의 피해를 그냥 감내해 내고 체념하게 만들었다. 이에 가농 농민들은 마지막으로 농민기도회를 열어 농협에 사건 해결을 촉구하려고 하였다. 1978년 4월 24일 광주 북동 천주교회에서 전국 각지의 회원 7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윤공희 주교와 농민회 지도 신부단의 공동 집전으로 열린 기도회에서는 함평고구마 사건 피해 보상과 농민회 탄압 중지, 구속 회원 석방 등이 요구되었다.

이날 농협의 전남도지부장과의 면담이 기동대에 의해 저지되자 농민들은 성당 뜰에서 연좌농성에 들어갔고 이어 단식농성에 돌입하였다. 29일 당국이 피해액 309만 원을 보상하고 강제 연행된 이들을 석방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으나, 단식 농성 중에 연행된 이상국, 조봉훈이 석방되지 않아 단식 투쟁은 계속되었다. 결국 5월 1일 전국에서 모인 40명의 신부와 개신교 인사 등 500여명이 다시 기도회를 열어 전국농민인권위원회를 결성하였고, 구속 중인 회원의 석방과 농민회 탄압 중지를 요구하였다. 다음 날 이상국, 조봉훈의 석방됨에 따라 단식 농성은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단식 8일 만에 얻어낸 피해 보상액은 피해 농가 모두가 아니라 그동안 끊임없이 피해 보상을 요구해 왔던 가농 회원들에게만 돌아갔다. 그리고 감사원이 농협 4개 도지도부에 대해 직원 300여명과 국세청 직원 등을 동원하여 감사한 결과, 농협이 11개 국정회사와 짜고서 고구마 수매자금 415억 중 80억 원을 부정 유출시켰다는 것을 밝혀냈다.

침묵과 굴종이 강요되던 엄혹한 유신시대에 이처럼 투쟁을 통해 농민들이 권리를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가농의 활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농은 피해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과학적으로 피해 상황을 조사 분석하였다. 그 내용은『함평군 고구마 사건 경과 보고』를 통해 알 수 있다.  

가톨릭농민회는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JOC)의 농촌청년부로 시작하여 1966년 ‘한국가톨릭농촌청년회(JAC)’로 발전하였으며, 1972년에 '한국가톨릭농민회'로 명칭을 바꾼 후 본격적으로 농민의 권익 향상을 위한 실천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중적인 농민운동 조직이 없었던 상황에서 가농의 조직과 활동은 농민운동의 발전에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다. 

충남 금산군 남이면 건천리 건천분교에 보존되어 있는 한국 가톨릭농민회의 40여 년간의 활동에 관한 기록은 1960년 이후 한국 농민운동의 역사 전체를 보여주는 기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자료들 중  주요한 농민운동 사건과 관련된 자료가 사업회에 이관되었다.(2002년)

가농에서 이관된 주요 사료는 1977년 함평고구마 사건, 1978년 노풍피해보상운동, 1979년 안동교구농민회사건(오원춘 사건), 1982년 농지세철폐운동, 1983년 조합장 직선제를 위한 백만인 서명운동, 1985년 소 값 피해보상운동, 1986년 미국농축산물수입반대운동, 1987년 농가부채해결운동, 6월 항쟁 관련, 삼양사 소작 투쟁, 남북종자 및 농민교류운동, 1988년 고추제값받기운동 및 수세폐지운동 등과 관련된 것들이다. 그 밖에도 전국농민회총연맹, 한살림운동, 우리밀살리기운동, 생명공동체운동, 농민교육 자료, 각종 집회 및 시위 관련 유인물, 사진, 물건 자료 등도 포함되어 있다. 이들 사료는 보존처리를 거치고 사료관의 정리원칙에 따라 체계적인 정리를 한 후 오픈아카이브를 통해 DB 서비스를 하고 있다. 가농의 자료들은 한국의 농민운동을 정리하는 데 귀중한 자원으로 유용하게 활용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