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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오염에 눈을 뜨다

1979년 봄, YWCA 위장결혼식 사건 항소심 재판정에서 인정신문이 진행되고 있었다. 

“피고인 최열, 직업이 무엇입니까?”

“저는 공해평론가입니다.”

“네? 그런 직업이 어디 있어요? 똑바로 말해요!”

“우리나라는 지금 산업화로 인해 하늘이 온통 검은 연기로 뒤덮여있습니다. 저는 그 공해를 반대하는 공해평론가입니다.”

판사는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열의 목소리에는 당당함이 묻어있었다. 학생운동 다음으로 갈 길이 노동운동이던 시절에, 그가 자신의 전공인 농화학을 살려 앞으로 공해문제를 다루고 싶다고 하자 동료들은 반대했다. 당시에는 노동현장의 문제가 당면 과제로 가장 시급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 외의 부문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1960년대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발생한 공해문제가 1970년대에 들어서 중화학공업단지의 건설로 점차 심각해져갔다. 정부와 기업의 무관심과 책임방기로부터 비롯된 환경 파괴와 공해에 피해를 보는 것은 오롯이 국민이었다. 그러니 반공해운동은 곧 자본과 정부에 대한 투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최열은 두 번의 감옥생활을 하는 동안 어머니에게 부탁해 250여 권의 환경관련 책자와 자료들을 구해 독파하였고, 이후 환경문제 전문가가 되었다. 

1982년 5월 3일 그는 서울 혜화동에 한국공해문제연구소를 열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그 무렵 최열과 식사를 같이 하는 사람들은 그가 하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공해 얘기만해서 밥맛이 떨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공해, 공해, 공해 얘기 좀 그만 해. 자꾸 공해 얘기를 하는 최열 네가 바로 공해야!”

이런 ‘최열 공해’에 두 손 두 발 다 든 사람이 정문화와 허훈순이었다. 정문화는 최열의 열정적인 공세에 설득당해 공해문제연구소 창설에 함께 하며 환경운동의 기틀을 잡는데 기여했다. 그리고 허훈순은 최열의 아내가 되어 험난한 세월을 함께 했다. 

한국의 환경운동사상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남은 ‘진로 주정공장 설립 저지운동’은 목포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 쟁취한 시민환경운동이었다. 1983년 6월 15일 목포에서 방사선과 의사로 일하며 환경운동과는 크게 관련이 없었던 서한태는 지인으로부터 깜짝 놀랄만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제주도에서 쫓겨난 진로의 주정공장이 목포시민의 상수원이 될 영산강 상류로 온답니다. 이 공장에서 배출될 폐수는 자그마치 하루에 2,700톤이래요. 거의 허가가 나있는 상태래요. 진로 측에서 이미 폐수처리시설 공사까지 하고 있대요.”

당시 목포는 전국에서 물사정이 가장 나빠 영산강 하구둑 공사 완공으로 조성된 영산호로 물 부족 사정이 해소되기를 갈망하고 있던 차였다. 서한태 박사는 이 충격적인 소식을 여러 지역 단체들에게 알리고 목포지역단체협의회를 탄생시켜 영산호보존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이들이 발빠르게 움직여 전남도지사의 공사 불허결정이 받아냈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한 일이었다. 

진로 측이 환경청에 소원을 제기해 ‘전남도지사의 불허조처는 월권’이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반짝 일어난 환경운동은 시민이 조직되지 않은 상태였기에 성공을 담보할 수 없었고, 게다다 지역이기주의라는 흑색선전에도 시달려야 했다. 영산호보존위원회는 조직을 재정비하여 무안, 함평, 영암, 해남 들 4개 군을 묶어 영산호유역환경보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그 과정에서 한국공해문제연구소는 최열을 급파하여 조사활동을 벌이고 공해관련 강연과 자료집 ‘영산호 공해 반대보고서’를 제작 배포하는 것으로 지원을 했다. 결국 허가도 받기 전에 폐수시설부터 짓기 시작한 것이 빌미가 되어 진로 주정공장은 반월공단으로 옮기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영산호보존회는 한국의 환경운동사에 첫 투쟁 성공 사례를 기록하며 삼학도보전회와 유단산보전회와 함께 목포환경운동연합으로 거듭난다. 

공해문제연구소가 중요하게 진행한 일은 주부를 대상으로 한 공해 교육이었다. 그 결과로 1986년 여성환경운동의 효시인 공해반대시민운동협의회(이하 공민협)가 결성되었다. 공민협은 그로부터 2년 뒤 공해추방청년협의회와 통합하여 공해추방시민운동연합(이하 공추련)을 결성하고, 1987년 6월항쟁 이후 대중적인 환경운동을 주도해나간다. 

1988년 9월 10일 ‘공해 추방, 반핵 평화’의 깃발을 걸고 출범한 공추련은 운동의 중심을 반핵으로 가져가며 새로운 환경운동의 장을 열어갔다. 공추련이 반핵의 기치를 내세우게 된 것은 1986년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원자력 발전소사건에서 출발했다. 체르노빌사건으로 유출된 방사능이 가져온 파괴력으로 전 인류가 발칵 뒤집혔고, 핵물질이 핵무기와 핵에너지는 같은 실체를 가진 괴물이라는 인식을 공유하게 되었다. 

1993년 4월 전국의 주요 8개 환경단체가 통합하여 ‘무분별한 개발과 생태계 파괴를 극복하고, 인간과 자연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지속 가능한 사회건설’을 목적으로 환경운동연합이 창립되었다. 환경운동연합은 ‘단순한 저항과 반대운동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과학적 원인분석을 기초로 시민들이 공감하고 동참하는 실천운동’(창립선언문 중에)으로 환경운동을 발전시키고자 했다.

1995년 12월 굴업도 핵폐기장 계획 저지 투쟁은 굴업도와 덕적도의 청년들과 함께 결국 백지화를 이끌어낸 사건이었다. 환경운동연합 활동가들이 굴업도 소식을 듣고 간 날은 원자력연구소가 이미 지역경제 발전을 내세우며 대대적인 홍보를 하여 주민들이 막 설득당한 시점이었다. 그러니 핵폐기장이 왜 나쁜지를 아무리 설명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끈질긴 설득과 활동으로 마침내 승리를 일궈내기도 했다.

환경운동연합은 이렇게 우리 삶의 터전과 생명을 해치는 상황이 발생한 현장으로 내려가 지역 주민들과 함께 온 몸으로 부딪치며 직접 문제를 해결해나갔다. 1997년 간척지에 농업용수를 댈 목적으로 건설된 시화방조제가 죽음의 호수가 되어가자 서둘러 조사 작업을 하고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며 주민들과 함께 문제 해결에 나선 것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환경운동연합은 국내 지역 차원의 환경문제뿐만 아니라 지구환경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글  박민나(자유기고가) 
'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여성노동운동가 8명의 이야기' 출간(2004년 )과 한국여성노동자회 계간지 '일하는여성'에 '박민나의 삶이야기'를 연재하면서 많은 여성노동자들을 만나 글로 옮기는 일을 하였다. '여성의 삶과 문화' 공저, 한겨레신문 '길을 찾아서 이총각 편' 연재, 뮤지컬 메노포즈 번안 등 다양한 글쓰기를 이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