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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산업선교회에서만 모일 수 있습니다 - 영등포산업선교회 60년
우리는 산업선교회에서만 모일 수 있습니다
“우리 노동자들은 바보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바보가 되도록 훈련받았습니다. 우리는 10년 동안 공장에서 일하지만 보너스도 받지 못하며 퇴직금도 받지 못합니다. 임금 인상이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우리의 생계는 보장되지 않습니다. 1주일 간 하루도 쉬지 않고 하루에 12시간씩 일하지만 우리들의 이야기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우리는 산업선교회에서만 모일 수 있습니다.” (NCCK. 『1970년대 노동자 투쟁과 증언』. p453)
1970년대를 살아낸 노동자의 이 증언은 누가 말했는지 그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으나, 아무나의 이름을 붙여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보편적 사정을 담고 있다. ‘바보가 되도록 훈련받았다’는 이 노동자들에게 영등포산업선교회는 어떤 존재였기에 이들은 여기서만 자신들의 삶을 털어 놓을 수 있었다고 했을까?
영등포산업선교회는 1957년 4월 12일 예장총회 산업전도위원회가 산업선교를 공식적으로 선언하면서 시작되었다. 산업전도위원회가 우리나라 경공업의 중심지라 할 영등포 지역을 노동자 전도의 첫 거점으로 지정하여 영등포산업전도회를 세운 것이다. 그 후 60년 동안 영등포산업선교회는 영등포도시산업전도회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 성문밖교회 등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늘 가진 것 없는 자들의 피난처가 되었고 학교와 후원자 역할을 해왔다.
산업 현장의 전도자 영등포산업선교회의 60년 세월
설립 초기에 영등포산업선교회는 공장 목회를 통한 전도에 주력하였다. 노동자나 기업주, 관리자의 구분 없이 심지어 비기독교인 기업주까지도 포괄하여 전도를 하는, 말하자면 산업 현장에서 전도를 한다는 개념으로 출발하였다. 당연히 이 시기에는 예배 참석자의 숫자가 중요했으므로 기업주가 노동자에게 예배 참석을 강요하는 일이 많았다.
영등포산업선교회는 1964년에 이르러 전도의 관점을 바꾸게 된다. 이 시기에 영등포산업선교회를 전담했던 조지송 목사에 의하면, 기업주와 노동자, 관리자는 각자 처한 삶의 현실이 너무나 달랐기에 복음 역시 다르게 받아들였다고 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강제로 참석했던 노동자는 예배를 기업주에게 무조건 복종하도록 만들기 위한 수단이라 여겼고, 자신들이 공장에서 당하는 고통스러운 상황에 대한 인식이 없는 복음에 대해 아무런 공감을 하지 못하여 복음 전도는커녕 복음에 대한 반발심을 키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평신도 노동자가 활동의 주체가 되도록 관점을 바꾸는 일은 시대적 과제이면서 동시에 선교적 과제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성서적 관점으로 본 노동 노동법 산업사회학 산업윤리학 노동운동과 평신도 신앙운동 등의 강의를 마련하고 노동자 훈련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활동은(1964년~ 1967년) 일정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과제를 남겼다. 노동자들은 강의를 통해서는 해결되지 않는 의문들, 이를테면 작업 중 손가락이 잘라졌는데 어디서 어떻게 보상을 받을 수 있는가, 체불임금을 주지 않을 때 어떻게 대항해야 하는가, 수당 없는 연장근무를 안 할 수는 없는가와 같은 의문에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들이 겪는 삶의 현실은 개별 공장이나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라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기독인 노동자들이 아무리 잘 훈련받는다 할지라도 이 불의하고 거대한 구조 앞에서는 무력하고 무지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영등포산업선교회가 노동조합을 지지하고 지원하는 것을 새로운 목표로 삼게 된 배경이다.
1968년 이후 3년간, 영등포산업선교회는 독일의 프리드리히 에버트재단과 대한노동조합연맹의 협력을 받아 노동조합운동 지도자들을 육성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그 결과 약 1200명의 조직가들을 만들어냈다. 특히 방직공장 노동자들을 훈련하는 데 주력했으며, 이 시기에 서울과 경인 지역에 수백 개의 노조가 조직되었고, 조합원은 4만 명에 이르렀다. 한마디로 이 시기의 영등포산업선교회는 노조를 통한 활동기였다. 책임자였던 조지송 김경락 목사 역시 필리핀에 있는 아시아 노동자학교에서 노동 과정을 이수하고 공장에 취업하여, 일정 기간 노동자로 일하는 등 노동 문제에 관한 전문적인 훈련을 받았다.
영등포산업선교회의 노동조합에 대한 구별 없는 지지에 제동에 걸린 것은 1971년 김진수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김진수사건은 1971년 3월 영등포에 있는 한영섬유에서 발생했다. 1970년 12월 이 회사에 노조가 결성되자, 회사는 노조를 와해시키기 위해 깡패를 고용했고, 이들이 조합원 김진수씨의 머리를 드라이버로 가격하여 살해했다. 이 일을 두고, 회사는 물론 섬유노조조차도 개인 간 시비에 의한 우발적 사건으로 처리하였다. 이 사건이 있기 전에 영등포산업선교회는 한국노총의 섬유노조 서울지부와 사무실을 함께 썼고, 섬유노조 지도자들과 합심하여 9개의 회사에서 약 5,200명의 노동자들을 조직할 정도로 한국노총에 협력적이었다. 당시에는 이른바 어용노조 혹은 노총이 정부와 기업의 영향 아래 있다는 점이 확실하게 인지되지 못한 상황이었으므로, 영등포산업선교회의 실무자들은 한국노총의 지도자들에 대해 신뢰와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김진수사건은 명백한 노조탄압, 기업주에 의한 노동자 살해사주사건이었음에도, 한국노총과 섬유노조는 개인 간의 싸움이라며 회사의 편을 들었다. 게다가 1972년 유신시대가 시작되자 한국노총은 “유신헌법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고, 급기야 1974년 영등포산업선교회의 인명진 목사와 김경락 목사가 투옥되자 산업선교회를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여, 영등포산업선교회와 한국노총은 화해할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다.
1972년부터 영등포산업선교회는 노동조합에 대한 지원이 아니라 노동자의 의식화를 위해 지원하기 시작했다. 노동조합을 설립하기 위한 노동자 교육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서 주체로서의 노동자 교육, 소그룹 중심의 의식화 교육을 시작했고 이는 곧 유신시대와의 전면적 대립을 의미했다. 70년대 후반기 노동운동사의 흐름을 바꿨던 주요한 사건들, 즉 대한모방 방림방적 남영나일론 원풍모방 해태제과 콘트롤데이터의 투쟁 등은 모두 영등포산업선교회의 지원 속에서 진행되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영등포산업선교회는 ‘도산(都産)이 침투한 기업은 도산(倒散)한다.’는, 언론을 동원한 대대적인 마녀 사냥 속에서 조직의 존립을 위협받았지만, 여전히 노동운동의 후원자로, 노동자의 친구로 자기 역할을 해냈다.
성문 밖 사람들을 위한 집
저 엄혹한 80년대에도 영등포산업선교회는 여전히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피난처요 방패가 되어주었다. 여성노동자들이 모여 문화제를 한 곳도, 구속된 노동자를 위한 석방운동을 펼친 곳도, 노동자의 날을 기념하는 행사를 한 곳도, 먼저 간 노동자의 장례를 치룬 곳도 영등포산업선교회 즉 성문밖교회였다. 학생운동에 연대하는 노동자의 성명서가 발표된 것도 이곳이었다. 이곳이 아니면 그 일을 할 곳이 없었다.
한 노동자의 고백처럼, 60년 동안 영등포산업선교회는 세상 어디에서도 머물 곳을 찾을 수 없던 노동자들에게 가장 안전하고 따뜻한 집이 되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