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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노트 신부의 간절한 외침 - 조작이다! 조작이다!

31살의 청년 시노트 신부(James P. Sinnott, 한국이름 진필세)가 뉴욕의 메리놀 외방전교회로부터 한국의 선교사로 파견 지시를 받았던 날은  4월혁명이 일어난 1960년 4월 19일이었다. 어쩌면 이는 후일 한국 민주화운동과 숙명처럼 얽히는 그의 미래를 암시한 하나의 예고였는지도 모른다. 독재정권에 의해 한국의 인권이 가장 억압받던 시기에 가장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들을 온몸으로 품었던 푸른 눈의 신부. 그는 그해 6월 신부 서품을 받고 8월 29일 인천에 도착하여 오랫동안 영종도에서 사제생활을 하다가 1975년 강제추방을 당할 때까지, 그리고 그 후 자신의 조국인 미국에서 10년 이상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적으로 싸웠다.

하지만 1974년 이전의 그는 보수적이고 냉전적 사고를 가진 평범한 미국인 선교사였다. 그런 그가 1974년 봄 ‘섬마을 사제에서 거리의 투사’로 바뀌게 된다. 거대한 세력에 의해 선이 말살되어 가는 인권의 사각지대였던 한국에서 시노트 신부의 내면에 조금씩 쌓이고 차오른 정의감이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 계기는 민청학련사건과 인혁당사건이었다. 평범한 학생들을 하루아침에 공산주의자로 둔갑시켜버려 한국사회 전체에 먹구름을 드리운 대규모 공안사건을 겪으면서, 제3자로 방관만 한다는 것은 마치 십자가에 달리기 전날 예수의 고통을 외면하고 도주한 제자들의 배반과도 같은 것은 아닌지 그는 몹시 괴로워했다. 그래서 그는 빈스 알로코 신부의 권유로 비슷한 고민을 하던 외국 선교사들의 모임인 월요모임에 참석하면서 사제로서 현실문제에 대한 새로운 실천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무엇을 할지 고민하던 그는 김수환 추기경이 1971년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했던 강론이 자꾸 떠올랐다. 추기경은 한국인들이 기본적인 존엄성을 박탈당하고 죄 없이 감옥으로 보내지고 신념 때문에 고문당하고 있는데, 정작 신자들은 아무런 대응도 못하고 있다며 누구보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압제의 위험에 처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도록 신자들을 가르쳐야만 한다고 했다. 그 말을 떠올리면서 시노트 신부는 김수환 추기경에게  "추기경님, 왜 가톨릭은 잠잠합니까? 개신교 목사님들은 투옥되고 산업현장에서 뛰고 계시는데, 성령께서는 개신교에서만 활동하십니까? 한국 가톨릭은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라는 내용의 다소 격앙된 편지를 썼다. 물론 추기경도 그와 같은 생각이었다. 시노트 신부를 만난 추기경은 그를 격려했다. 당시는 개신교가 더 적극적으로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던 시절이었는데, 김수환 추기경에겐 시노트 신부의 생각을 알게 된 것이 천군만마를 얻은 심경이었으며, 시노트 신부는 자신의 생각을 지지해 준 추기경이 진심으로 고맙고 든든했다. 그는 이제 거침없이 행동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

지학순 주교의 구속이 계기가 되어 함세웅 신부 등을 중심으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결성되던 날인 1974년 9월 26일은 마침 한국순교자대축일이었다. 그날 ‘순교자 찬미기도회’를 마친 사제와 수도자, 신자 1천여 명은 “유신헌법 철폐하라” “민주헌정 회복하라” “구속자를 석방하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구호를 외치며 명동성당에서 명동파출소 앞까지 거리시위를 벌였다. 그때 시위자들의 무리 속에 있던 시노트 신부는 커다란 덩치를 이용하여 경찰들을 밀치고 그들이 머리에 쓴 보호장구를 벗기며 진압에 대항했다. 그는 온통 미제 장비로 중무장한 전경들과 마주치면서 순간 자신의 나라 미국에 대한 분노와 함께 부끄러움이 일었다.

1974년 봄부터 1975년 4월 30일 강제추방 될 때까지가 시노트 신부의 생애에서 가장 격렬한 투쟁의 시기였으며 동시에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에 충만했던 시기였다. 

1974년 7월, 민청학련의 배후로 지목받고 있던 지학순 주교는 양심선언 발표 후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었다가 풀려나고, 얼마후 다시 연금되었는데 당뇨병을 앓고 있어 성모병원에 감금되었다. 그때 미국 워싱턴 포스트의 도쿄 특파원 돈 오버도퍼(Don Oberdorfer)가 한국으로 취재를 나와  시노트 신부를 만나 연금된 지 주교에 대한 기사를 쓸 수 있도록 면담을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다. 지 주교의 면담은 가족과 사제들에게만 허용되어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중앙정보부원들이 병실 앞에서 출입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통제했다.

시노트 신부는 오버도퍼에게 성직자 셔츠를 입혀 지 주교의 병실을 찾아갔다. 그곳을 감시하고 있던 중앙정보부원에게 “사제들이 양심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게 잠시 나가달라”고 부탁을 하고, 오버도퍼가 인터뷰를 하는 동안 도청을 방해하기 위해 혼자서 계속 큰 소리로 떠들었다. 

시노트 신부는 1975년 동아일보사 언론인들의 자유언론실천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그는 광고탄압에 격려광고로 대응하는 수많은 시민들 틈에 끼어 인혁당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구명운동을 함께 벌이다 추방된 오글 목사를 생각하며 그의 뒤를 따를 각오를 다졌다. 동아일보 광고란에 “(마틴)루터 킹 목사님의 탄신일을 맞이하여 오글 목사님의 행운을 빌며. 아직 추방되지 않은 시노트 신부”라는 글을 새겼다. 그리고 기자들과 함께 동아일보사 안에서 밤샘농성을 벌였다. 

시노트 신부는 인혁당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위해 동료들과 함께 온몸을 내던져 싸웠다. 인혁당사건과 관련하여 그가 진정으로 바랐던 것은 군사법정이 아닌 공개된 민간법정에서 열리는 공정한 재판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조작이다, 조작이다’라고 고함을 지르는 것으로 유명해진 사람입니다.”고 후일 술회했다. 이처럼 그는 인혁당사건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그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기회가 될 때마다 부르짖었다. 당시 당국은 인혁당 관련자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가기 위해 민청학련 관련 학생들과 의도적으로 분리시키려고 여론을 조작했다.

1975년 중앙정보부원들이 인혁당 피고인들의 아내 10명을 남산 중앙정보부에 강제 연행하여 각종 협박을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녀들 가운데 강력히 항의하는 사람들은 비교적 빨리 풀려났지만, 고분고분해 보이고 겁을 많이 먹은 부인들은 오래 감금되어 이루 말 할 수 없는 협박을 당했다. “인혁당사건이 조작되었다고 다시는 언급하지 않겠다”  “어떤 시위에도 나가지 않겠다” 등을 쓴 진술서에 강제로 서명을 한 후에 풀려날 수 있었다. 이에 시노트 신부는 분노로 몸을 떨었고 더 적극적으로 인혁당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급기야 인혁당 가족들을 후원하기 위해 구속자가족협의회의 공동대표직을 맡았다.

시노트 신부는 인혁당사건으로 사형이 집행된 당시의 참담한 심정을 <1975년 4월 9일>이란 제목의 책으로 기록했다. 그는 분노에 가득 찬 채, 사형장인 서대문형무소 앞에 홀로 서서 인혁당 가족들과 함께 주검만 이라도 돌려달라고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그러다가 결국 경찰들에게 팔다리가 들린 채 끌려갔다. 그 장면은  사진이 되어 외신에 크게 실렸다.  그는 이 참담한 죽음과 이들의 시신 확인 과정 등에 대하여 교회와 외신을 통해 전 세계에 알림으로써 국제법학자협회가 4월 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지정하는 자료를 제공했다.

그가 정의의 편에 서서 행동한 대가는 이 나라를 떠나는 것이었다. 시노트 신부는 결국 체류연장 허가를 받지 못한 채 강제출국을 당했다. 한국을 떠나는 날 비행기에 오르기 전 그는 모든 한국인이 하나가 되어 화해하고 서로의 모든 잘못과 죄를 용서하고 사랑과 일치를 이루는 참된 법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가 다시 한국을 찾았던 2002년, 마침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인혁당 관련자들은 무죄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그는 그때의 심정을 ‘해방’과 같은 것으로 마치 감옥에서 풀려난 것 같다고 했다. 무고하게 목숨을 잃은 인혁당 사람들로 인해 오랫동안 죄의식에 빠져있었던 그가 그토록 외쳐왔던 말인 ‘조작이다. 조작이다!’에 대한 답을 비로소 들은 느낌이었다. 2014년, 푸른 눈의 신부는 그가 사랑했던 나라 한국에서 영면했다.


글  어수갑
독일 유학 시절 동포운동단체인 재유럽민족민주운동협의회 총무부장과 한/독판 월간 <민주조국>/ 편집인 거쳐 귀국 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수석연구원 등 역임. 저서로는 <베를린에서 18년 동안 부치지 못한 편지/휴머니스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