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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_ 이태영
1956년 어느 날, 태영은 심호흡을 한 뒤 대법원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세 번인가 네 번인가, 번번이 헛걸음을 했지만 태영은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연로한 대법원장 김병로는 태영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또 왔소?”
“네, 대법원장님. 또 왔습니다. 불평등한 가족법을 개정해 주십시오.”
“호주제부터 철폐하자, 이거지요?”
호주제란 호주를 중심으로 호적에 가족집단을 구성하고 이를 남자 혈통을 통해 대대로 이어가는 제도였다. 호주였던 아버지가 죽으면 장남이 호주가 되고, 결혼하지 않은 장남이 죽으면 나머지 아들이 순서대로 그 뒤를 잇는 것이다. 딸은 아들 다음으로 호주가 될 수 있고, 맨 마지막이 아내였다. 남성 중심의 호주제는 필연적으로 아들을 더 선호하게 만들었다. 남자든 여자든 법 앞에 평등해야 하므로 남성 중심의 호주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것이 태영의 생각이었다.
“그뿐입니까? 동성동본 결혼 금지제도도 폐지해야 하고, 이혼 시 재산분할청구권도 개정해야 합니다. 부모친권은 또 어떻습니까? 어머니가 여자라는 이유로 친권을 가질 수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어허, 내 살아생전에는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습니까!”
김병로가 언성을 높였다.
“대법원장님, 재고해 주십시오. 여성...”
대법원장은 태영의 말을 듣지도 않고 싹둑 잘랐다.
“법조계 초년생이 뭘 안다고 나서는 것이오? 쓸데없이 분란 일으키지 말고 다시는 찾아오지 마시오.”
태영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법원장님. 안녕히 계십시오. 또 오겠습니다.”
김병로 대법원장은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의 변호를 위해 헌신한 유명한 변호사였다. 태영이 1952년 여성으로서는 우리나라 최초로 사법고시에 합격했을 때, 판사로 임용하려고 애써준 고마운 사람이기도 했다. 김병로는 대통령인 이승만을 만나 이태영을 판사로 임용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태영이 야당 정치인 정일형의 아내인 것도 못마땅했고 여성을 판사로 임용하는 것도 못마땅했다.
“여자가 판사라니! 시기 상조요.”
김병로는 그 뒤에도 몇 번이나 태영의 판사임용을 이승만에게 건의했다. 그러나 번번이 거절하는 바람에 태영은 어쩔 수 없이 변호사가 되었다. 김병로는 여성 판사임용을 인정할 만큼 당시로서는 깨어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남성 중심의 가족법 개정은 필사적으로 반대했다.
태영은 이런 벽을 숱하게 겪었다. 태영이 돌도 되지 않았을 때 탄광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홀로 남은 어머니가 세 남매를 키웠다. 당연히 살림이 넉넉할 리 없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늘 말했다.
“아들이든 딸이든 공부만 잘하면 대학에 보내주겠다.”
이웃들은 없는 형편에 딸까지 학교에 보내는 어머니를 뒤에서 욕하곤 했다. 그럴수록 태영은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고, 당시로서는 드물게 이화여전에 입학했다. 원래 태영은 법학과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어느 대학교 법학과에서도 여자는 받아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가사과에 진학했지만 늘 법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녀가 법을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은 남편 덕분이었다. 독립운동을 하다 감옥에 갇혔던 남편 정일형은 해방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어느 날 태영에게 말했다.
“당신, 법을 공부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 않았소. 지금이라도 해보지 그러오.”
당시 태영은 서른다섯도 넘은 나이였다. 게다가 아이가 넷이었다.
“네? 하지만 나이가......”
“배움에 나이가 어딨겠소?”
“그렇긴 하지만 아이들은 어쩌구요?”
“이제부터 애들은 내가 보겠소.”
태영은 남편의 응원에 힘입어 1946년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서울대에 입학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이었다. 그리고 1952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사법고시 합격자가 되었고, 판사 임용에 실패한 뒤 1954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가 되었다. 태영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이 되기 위해 태영은 언제나 불도저처럼 앞을 향해 달렸다. 무엇이 막아서든 멈추지 않았다. 여성 후배들에게도 태영은 늘 강조했다.
“가다가 벽에 부딪치면 벽을 뚫어서라도 길을 내라.”
이번에도 태영은 가족법이라는 남성중심의 벽에 부딪쳤고, 그 잘못된 법을 개정하기 위해 벽을 뚫으려 하는 중이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태영을 보고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에게 맞았는지 얼굴이 퉁퉁 붓고 보랏빛 피멍이 든 여자였다. 태영의 변호사 사무실은 언제나 그런 여자들로 붐볐다. 태영 외에는 누구도 그런 처지에 놓인 여자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태영이 따뜻한 차를 건네며 물었다. 잔뜩 주눅이 든 여자가 작은 목소리로 우물거렸다.
“남편이 하도 때려서... 죽을 것 같아서, 살려고, 이혼을 했는데... 애들이 보고 싶어서...”
여자가 양손에 얼굴을 푹 파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듣지 않아도 뻔했다. 아내를 죽도록 두들겨 팬 남편이라도 아이들의 친권은 그에게 있었다. 남자라는 이유로. 이 여자는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 몰래 찾아갔다가 전 남편에게 들켜 또 얻어맞은 것이다. 이런 남자조차 제대로 처벌할 수 없는 것이 당시의 가족법이었다.
태영은 자신을 찾아온 불행한 여성들을 외면할 수 없어 언제나처럼 밤늦도록 일에 매달렸다. 파김치가 되어 돌아가자 남편이 문을 열어주었다. 태영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남편이 따뜻한 차를 타주며 다정하게 물었다.
“보아하니 대법원장 찾아간 일이 잘 안된 모양이군요.”
태영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완고하시네요. 가족법 개정이 가능하기나 한 건지... 자꾸 힘이 빠져요.”
“해방 전에 많은 사람들이 똑같이 말했지요. 해방이 가능하기나 한 거냐고.”
독립운동을 하던 남편은 태영과 결혼한 뒤 감옥으로 끌려갔다가 해방된 후에 돌아왔다. 여성 혼자의 몸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남편 옥바라지를 하면서도 태영은 단 한 번도 남편을 원망하지 않았다. 남편이 하는 일이 옳다는 것을, 우리 민족이 반드시 독립해야 한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학교 교사였던 태영은 남편이 감옥에 끌려간 뒤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먹고 살길이 막막해 이불을 만들어 팔았다. 먼지가 어찌나 심했는지 천식에 시달렸고, 가위질을 하도 해서 엄지와 검지가 휠 정도였다. 그때는 가위마저 귀했다. 잘 들지도 않는 가위로 천을 자르면서 태영은 날이 잘 드는 가위 하나만 있었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남편에게 그 말을 했다. 그러자 남편은 외국에 나갈 때마다 가위를 사들고 왔다.
“이걸 보면서 우리, 어려웠던 때를 잊지 말고 삽시다.”
태영은 남편의 가위를 떠올렸다.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조국은 일본에 빼앗기고 남편은 감옥에 있던 시절에 비하면 천국이었다. 지쳐 있던 태영의 눈에 반짝 생기가 돌았다.
“그럼요. 조국도 되찾았는데 우리가 무얼 할 수 없겠어요. 일단 여성법률상담소부터 만들어야겠어요. 도움이 필요한 여성들이 너무 많은데 저 혼자서는 역부족이에요.”
태영의 노력으로 1956년 곤경에 처한 여성들에게 법률적 도움을 주는 여성법률상담소가 문을 열었다. 느리긴 했지만 동성동본이 결혼을 금지하는 법도 폐지되었고, 태영이 그토록 꿈꾸던 가족법은 1989년에 개정되었다. 호주제는 태영이 세상을 떠나고도 한참 지난 2008년에나 폐지되었다. 태영이 호주제 폐지를 주장한 지 51년 만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라는 타이틀을 달고 여성들의 인권을 위해 싸워온 태영은 그 공을 인정받아 막사이사이상을 비롯해 세계의 여러 인권상을 받았다. 세상을 떠날 때 태영은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돈이나 권력으로 지탱하는 사업은 결코 장수하지 못한다. 이웃과 함께 오로지 사랑으로 지탱해온 사업은 그 생명이 영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