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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회복의 교육을 詩로 노래하다_ 성래운

1979년 봄. 광주지방법원. 

이곳에서 전 연세대 교수이자 해직교수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는 성래운 교수의 재판이 열리고 있었다. 아침부터 법정 안은 인근 광주지역뿐만 아니라 멀리 서울에서 내려온 동료 교수와 학생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이 가득 차 있었다. 곱게 흰 한복을 입고 가슴에 수번을 달고 나온 성내운은 그런 그들을 뒤돌아보며 검은 뿔테 안경 너머로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다. 

“힘내세요, 선생님!”

누군가가 방청석에서 소리를 질렀다.

곧 재판이 시작되었다.

“피고 성래운은 평소 유신 교육에 대한 불만을 품고 교육의 민주화, 민중화를 요구할 목적으로 전남대 교수 송기숙과 공모하여 <우리의 교육 지표>를 초안하여, 다른 교수들을 참가토록 선동하였지요?”

“예.”

“피고는 연세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에도 민청학련사건 관련자 석방을 위한 기도회를 주최하고, 리영희 교수가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를 집필하고 구속된 것과 이 책들을 발행한 백낙청 씨가 입건된 것에 대하여 그들을 옹호하는 성명을 발표한 적이 있지요?

“예.”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검사의 심문에 성래운은 아무런 변명도 없이 순순하게 대답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이미 모든 것은 그들의 입맛에 맞게 짜여져 있었고, 재판은 그러한 과정에 따른 하나의 절차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피고가 할 말이 있으면 최후진술을 해주기 바랍니다.”

재판장이 말했다. 

그러자 성래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특유의 굵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드릴 말씀은 이미 조서에 다 나와 있으니까, 오늘은 그저 제 심경을 담은 시 한 편을 낭송하고자 합니다.”

그리고는 목청을 가다듬어 윤동주의 <서시>를 낭송하기 시작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때로는 낮게 때로는 배꼽 아래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결기에 찬 목소리로, 높낮이와 쉼과 이음이 곁들어진 그의 낭송은 살벌한 법정 안을 순식간에 딴 분위기로 만들어버렸다.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최후진술 대신 시를 낭송하는 동안, 한 번도 이런 장면을 경험해보지 못했던 재판장과 검사는 천장을 바라보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더이상 그곳 법정의 주역은 그들이 아니었다. 아니, 순간 그들은 모두 유신 정권에 충성하는 초라한 하수인으로 전락해버렸고, 대신 그들 위에 선구적 민족 교육자이자 탁월한 시 낭송자인 성래운이 있었다.

누군가는 성래운 선생의 시 낭송이야말로 국보급이라고 했다. 그는 놀라운 정도의 기억력으로 수십 편의 시를 암기하고 있었고, 그때그때 적재적소에 따라 특유의 굵고 절제된 목소리로 때로는 양성우의 <겨울 공화국>을, 때로는 한용운의 <복종>을, 때로는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나 문익환의 <꿈을 비는 마음>을 자유자재로 암송했다. 결혼식에서 따분한 주례사 대신에 시를 암송했고, 심지어는 교도소에서도 검은 고무신에 죄수복을 입은 채 시를 암송했다. 

그의 입에서 갇혀있던 시는 비로소 육체를 얻어 펄펄 살아서 뛰는 것 같았다. 그것은 모두에게 위안이 되기도 했고, 마음을 다지는 메시지가 되기도 했다. 

그의 제자이자 동지였던 김학민은 “1970~80년대 암울했던 시절, 선생님의 시 낭송은 독재정권을 향한 투쟁의 나팔이 되었고, 또 오랜 싸움 끝에 만나는 잔잔한 재충전의 휴식이었다.”고 했다.

늘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두꺼운 검은 뿔테 안경을 쓴 그는 원래 경성사범대학을 나온 교육학자였다. 그러나 ‘권력의 도구이기를 거부하고 진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겠다.’는 그의 꿈은 이승만과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산산이 부서진 지 오래였다.

엄혹했던 유신 시대. 박정희 정권은 독재 권력을 강화하고, 남북 분단을 핑계로 온 국토를 병영화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교육이 있었고, 그 기초는 이미 1968년 발표된 ‘국민교육헌장’에 나와 있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은 개인의 자유와 민주적 역량을 넓히는 대신 국가 중심의, 나아가서는 군사정권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는 일종의 교육 지침이었다. 

‘국민에 대한 국가의 우위’로 요약되는 이 헌장은 일왕의 절대 권력을 정당화하고 일왕에 대한 절대복종과 충성을 강요하는 일제의 ‘교육칙어(敎育勅語)’를 그대로 본뜬 것으로, 1993년 교과서와 정부 공식 행사에서 사라질 때까지 군사독재 정권의 추악함을 상징하는 사례 가운데 하나로 손꼽을 수 있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은 그 헌장을 초등학생들부터 모두 외우게 했다. 철저한 세뇌 작업의 일환이었다.

1978년 6월 27일, 성래운과 송기숙이 중심이 되어 작성한 <우리의 교육 지표>가 발표됐다. 국민교육헌장에 입각한 교육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저항을 담고 있었다.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 한마디로 인간다운 사회는 아직도 우리 현실에서 한갓 꿈에 머물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현실을 바로 알고 그것을 개선할 힘을 기르는 일이야말로 인간다운 인간을 교육하는 길이다.’

‘대학인으로서 우리의 양심과 양식에 비추어볼 때 우리의 오늘날 교육의 실패는 교육계 안팎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자발적인 일치를 이룩할 수 있게하는 민주주의에 우리 교육이 뿌리박지 못한데서 온 것이다.’

성래운과 송기숙은 그것을 서울, 부산 지역 교수들과 함께 발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자칫 구속되거나 해직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다들 마지막에 참여하지 않는 바람에 전남대 교수 11명만 서명하였다. 성래운은 그것을 AP통신과 아사히신문 등 외신에 전달했다.

과격한 내용도 아닌 이 선언서 하나가 유신 치하 잠들어있던 광주를 흔들었다. 다음날,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서명에 참가한 교수 11명을 긴급 체포했고, 이에 항의하는 학생들의 기도회와 시위가 이어졌다. 7월 5일에는 전남대에 휴교령이 떨어졌다.

주동인 송기숙 교수는 재판에 넘겨져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 위반이라는 혐의로 4년 형을 선고받았고 다른 교수들은 해직되었다. 성래운은 그 후 6개월간 수배 생활을 하다가 잡혀 광주교도소에서 송기숙과 함께 수감되어 재판을 받았다. 

‘...교과서에 실려 있는 역사가, 선량한 민중이 평화를 염원하며 살아온 발자취라기보다는 그 민중을 지배해 온 왕과 귀족들이 전쟁을 일삼으며 살아온 발자취라는 데에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교과서를 외우고 있노라면, 학생들은 부지불식간에 임금들의 은혜를 입어 민중들이 그만큼이라도 살아온 듯이 느끼도록 쓰여 있는 점입니다.’

‘모든 동포가 먹고 입는 것을 생산하는 가장 쓸모 있는 기술이 가장 덜 버는 기술이 되고, 일부 사람들을 위해서 사치품을 사다 파는 가장 쓸모없는 기술이 가장 많이 버는 기술이 되고 있다면, 그러한 사회적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우리 교사들 자신도, 사람에게 쓸모는 적지만 돈은 많이 버는 기술을 우러러보고, 쓸모는 많지만 돈은 적게 버는 기술을 얕잡아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1982년에 출간된 그의 저서 『인간회복의 교육』에 나오는 말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그때 법정에서 웅혼한 목소리로 시를 암송하던 모습을 잊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누구도 그의 이후, 그처럼 장엄하게 감동적으로 시를 암송하던 모습을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글 김영현(소설가)
1984년 창작과비평사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로 등단, 소설집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 <해남 가는 길>, <내 마음의 망명정부>, 장편 <풋사랑>, 시집 <겨울 바다>, <남해 엽서>등이 있다. 제23회 한국창작문학상 수상, 실천문학사 편집장 역임, 한신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하다가 현재는 양평에서 창작과 공부에만 열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