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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청원백만인서명운동-들불처럼 번진 유신헌법반대운동
1972년 유신헌법이 확정된 뒤, 이 땅의 백성들은 한숨조차 마음대로 쉬지 못했다. 탄압의 몽둥이가 어디서 날아올지 모른다는 공포감 때문이었다. 1973년 8월에 발생한 김대중납치사건은 박 정권의 의도와는 달리 유신체제에 대한 거센 저항의 물꼬를 터준 계기로 작용했다. 그해 가을부터 서울대 학생들의 유신반대 시위가 시작되었고, 시위는 각 대학으로 빠르게 번져나갔다. 이 무렵 각 언론사의 기자들이 오랜 탄압과 침묵 끝에 언론자유수호투쟁을 시작했으며, 때맞춰 재야인사 15명이 ‘지식인 15인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바로 그 무렵, 시국간담회 참석자들과 장준하가 중심이 되어 ‘개헌청원백만인서명운동’을 벌여 나갔다.
‘개헌청원백만인서명운동’은 마치 첩보영화처럼 진행됐다. 통일꾼 백기완은 《한겨레신문》 2008년 12월 3일에 실린 〈나의 한 살매〉라는 글에서 서명에 참여할 동지를 모으던 긴박감 넘치는 장면을 특유의 입담으로 풀어냈다.
“12월로 들어서면서부터 장 선생이 움직였다. 뜻말(취지문)을 신발 깔창 밑에 감추고 찾아가서 되도록 속으로 읽어보라고 내밀 것이요, 고개를 끄떡하면 새김(서명)을 받는데 맨 처음은 함석헌, 그 다음은 김수환, 홍남순, 천관우, 계훈제, 김순경, 김윤수, 김지하, 그리고 내가 꼬래비로 서른을 모았다.”
이렇게 해서 구성된 서명자 각자가 본부가 되어 개별적으로 또 다른 서명자를 규합하는 독특한 ‘개별 본부’의 구심점 노릇을 했다. 운동본부에 참여한 사람은 장준하를 비롯하여 김재준, 김수환, 천관우, 지학순, 백기완, 계훈제, 이호철, 홍남순 등 서른 명이었다.
선언문 발표를 앞두고 장준하와 백기완은 양일동의 집에 찾아갔다. 등사판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양일동이 어디에 쓸 거냐고 묻자, 대답이 궁해진 그들은 그 집을 나오고 말았다. 거사 계획을 미리 밝히면 양일동 또한 무사하지 못하겠기에 거기서 그친 것이다. 그들은 종로통 진명출판사에 가서 돈을 빌린 다음 등사판과 등사 원지 등을 구입해 장준하의 셋집으로 갔다.
1973년 12월 23일 밤, 장준하의 셋집에서 비밀회의가 진행되었다. 모인 사람은 집 주인 장준하를 비롯해 계훈제와 백기완 단 세 사람이었다. 그때, 동아일보사 문화부 기자 이부영이 인사를 꾸벅 하며 방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게, 이 기자.”
장준하는 이부영을 반갑게 맞이하며 대문을 단단히 잠갔다.
“아시다시피, 박 정권이 만든 유신헌법은 반드시 폐기해야 할 악법이오. 자, 지금부터 ‘개헌청원운동본부’ 창립 취지문과 성명서 초안을 한번 검토해 봅시다.”
장준하가 비장한 어조로 말문을 열며 방안의 탁자 위에 문건을 펼쳐놓았다. ‘헌법 개정 백만인 서명운동’을 벌이는 시대적 명제가 적혀 있는 문건이었다. 세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초안을 검토했다.
“이 기자, 선언문 발표는 내일 아침 아홉 시이고 장소는 기독교청년회관(YMCA) 2층일세. 이 문건의 내용을 빠뜨리지 말고 꼭 보도해주게.”
“예, 알겠습니다, 장 선생님.”
박 정권이 이미 언론을 장악한 뒤였기 때문에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보도 통제는 극심했다. 장준하가 이부영에게 기사화를 부탁했던 것은 그를 신임했기 때문이었다.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범투위)의 대변인이었던 장준하는 조홍규, 김도현, 이부영 등 범투위 내 청년위원들을 무척 아끼고 신뢰했다. 장준하가 국회의원 신분이던 시절, 이부영이 자신의 비서 손수향과 결혼한 인연을 계기로 더 각별해진 까닭도 있었다.
세 사람은 취지문과 성명문의 문안을 검토하고 수정하느라 밤을 꼬박 새웠다. 선언문 초안에 대한 문안 수정은 새벽녘에야 끝났다. 완성된 문안과 서명 양식을 잘 마무리한 그들은 며칠 전부터 비밀리에 약속해놓은 등사집에 가지고 가서 프린트를 했다.
1973년 12월 24일, 서울 YMCA 2층에서 ‘개헌청원백만인서명운동’ 선언문이 발표되었다. ‘개헌청원운동 취지문’은 이 운동을 주도한 장준하가 낭독했다.
“오늘의 모든 사태는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를 완전히 회복하는 문제로 귀착된다. 경제의 파탄, 민심의 혼란, 남북 긴장의 재현이란 상황 속에서 학원과 교회, 언론계와 가두에서 울부짖는 자유화의 요구 등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오늘의 헌법 하에서는 살 수가 없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오늘의 헌법은 그 개정의 발의권이 사실상 대통령에게만 속해 있는 것이다. 이에 우리 국민은 이와 같이 헌법 개정 발의권으로부터의 소외를 극복하고 우리들의 천부의 권리를 제시하는 방법으로 대통령에게 현행 헌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백만인청원운동을 전개하는 바이다. 이 운동은 우선 우리들 모두의 내 집안에서부터 시작하여 학원과 교회 그리고 각 직장과 가두에서 확대될 것이다.”
장준하는 선언문 발표와 더불어 ‘개헌청원운동본부’가 발족되었음을 선언했다. 발표가 끝나자 기자들이 장준하에게 물었다.
“백만인에게서 서명을 받는다니,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개헌청원백만인서명운동’이라는 거창한 이름에 비해 발기인이 고작 30명에 지나지 않아서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장준하는 거침없이 답변했다.
“우리 서른 명 각자가 다 본부입니다. 누구든지 흰 종이에 이름과 서명을 써서 서른 명 본부 아무에게나 갖다 주면 됩니다. 다만 나 장준하가 그 서른 명 본부들이 모은 서명을 한꺼번에 모으는 일을 할 겁니다.”
“그렇다면 장 선생이 총본부인가요?”
“좋을 대로 생각하시오.”
답변을 마친 장준하가 단상에서 내려오자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이 뜨겁게 박수를 치며 공감을 표시했다.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이대며 이 장면을 연신 찍고 있을 때였다.
“저 자들을 빨리 끌어내!”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문을 박차고 발표장에 뛰어들어왔다. 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본 장준하, 함석헌, 계훈제, 백기완은 재빨리 다른 문으로 빠져나갔다. 그날로부터 서른 명 한 사람 한 사람이 본부를 자처한 서명운동은 급속도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12월 26일 밤, 국무총리 김종필이 라디오와 텔레비전에 나와 장장 1시간 40분에 걸쳐 ‘특별연설’을 했다. 개헌운동을 즉각 중지하지 않으면 강력히 처벌하겠다는 엄포가 주된 내용이었다. 사흘 뒤인 12월 29일에는 박정희가 직접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그동안 나는) 유신체제의 불가피성을 누누이 설명하고 절대로 경거망동이 있어는 안 되겠다는 점을 간곡히 호소한 바 있다.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소위 헌법개정 백만인 청원운동을 즉각 중지할 것을 엄중히 경고해 두는 바이다.”
하지만 활시위를 떠난 화살은 과녁을 향해 맹렬히 날아갔다. 재야인사들과 시민들의 적극적인 동참에 힘입어 ‘개헌 청원 서명’ 운동은 일파만파로 번져 나갔다. 이 운동이 시작된 지 8일 만인 1974년 1월 1일 서명자가 5만 명을 넘어섰으며, 불과 10여 일 만에 서명자 수가 30만 명을 돌파할 만큼 파급력이 컸다.
개헌지지 서명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가운데 유신 반대 데모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1974년 1월 1일 기독교청년협의회 회원 3천여 명이 통일 기원 예배가 끝난 뒤에 가두시위를 벌였으며, 5일에는 민주통일당이 개헌청원운동의 적극적 참여를 정무위원회에서 의결했다.
1월 7일에는 이희승 · 백낙청 · 이호철 · 박태순 등 문학인 61명이 지지성명을 내고 서명운동에 동참했다. 광주 지역에서는 성직자 41명이 자유민주체제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이 와중에 공화당의 초대 총재이자 당 의장을 역임한 정구영이 전 사무총장 예춘호와 함께 공화당을 탈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소식을 들은 박정희는 격노한 채 어쩔 줄을 몰랐다. 1월 8일, 제1야당인 신민당은 개헌을 위해 진력하겠다고 발표했다.
개헌지지 열풍이 전국적으로 번져나가자, 위기감을 느낀 박정희는 마침내 사태를 진압할 초강수를 두었다.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2호가 발표되었다. 누구든지 유신헌법에 대한 논의만 해도 감옥에 보낼 수 있는 괴물 법이었다.
“유신헌법을 고치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과대망상’에 걸린 ‘불순분자들’이다. 그들의 경거망동을 용납하지 않겠다.”
박정희는 자신의 장기집권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거침없이 짓밟았다. 그의 싸늘한 말 한 마디에 지금껏 국민들에게서 존경을 받던 김수환 추기경, 김재준 목사, 함석헌 등 재야 지도자들이 간단히 불순분자로 치부되었다. 긴급조치가 발동되자 당장 ‘개헌청원 서명운동’에 급격한 제동이 걸렸다. 사법 당국에서 즉각 압수 수색이 들어올 터였다.
“백 동지, 머지않아 우리 집에 압수 수색이 들어올 거요. 어찌하면 좋겠소? 우리야 각오를 했지만 서명자들이 다칠까봐 걱정이오.”
“장 선생님, 저도 그것이 걱정됩니다.”
“할 수 없소. 우리가 서명자들을 보호할 수밖에.”
두 사람은 눈물을 머금고 서명 용지를 모두 파기했다. 당국이 명단을 입수한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서명자들에게 커다란 재앙이 닥칠 것은 물어보지 않아도 빤한 사실이었다. 장준하의 장남 호권과 백기완이 마당에서 명단을 불살랐다. 불길이 서명 용지를 태우는 것을 보던 장준하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장준하와 백기완을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구속한다.”
1974년 1월 15일, 비상계엄군법회의 검찰부에서 판결이 내려졌다. 두 사람은 안양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긴급조치라는 미친 몽둥이가 한바탕 휘젓고 지나가자, 유신 악법을 바꿔보려는 노력은 무참히 저지되었다. 하지만 장준하를 비롯한 ‘개헌청원백만인서명운동’에 동참했던 사람들의 마음만은 그 누구도 빼앗지 못했다. 이들의 진정성은 이후 서슬 퍼런 유신체제에 맞서 싸우는 반독재민주화투쟁의 원동력이 되었다.
글 박선욱(시인, 평전작가)
1959년 나주 출생. 1982년 시 〈누이야〉외 3편이 실천문학 제1회 신인작품으로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이후 대표작으로 《그때 이후》《다시 불러보는 벗들》《세상의 출구》《회색빛 베어지다》 등의 시집과 《채광석 평전》《김대중 평전》《황병기 평전》《윤이상 평전》 등의 인물평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