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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으로 심장을 뛰게 하라 - 노래를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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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교차로는 슬픔과 분노로 끓어 넘치고 있었습니다.

“강경대를 살려내라!”

“노태우정권 타도하자!”

차량통행이 전면차단 되어 드넓은 광장이 되어 버린 교차로와 뒷골목까지 빼곡히 들어찬 인파가 한 목소리가 되어 부르짖었지요. 1991년 5월 18일, 광주항쟁이 일어난 지 꼭 11년이 되던 날이었습니다. 

한 달 전, 명지대생 강경대가 시위 도중 전투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진 이래 다섯 명의 젊은이가 분신이나 의문사로 사망해 온 나라가 당혹감과 슬픔에 빠져 있었을 때입니다. 강경대의 장례식 노제가 열린 신촌교차로는 그 절정의 장소였지요.

“한밤의 꿈은 아니리 오랜 고통 다한 후에, 내 형제 빛나는 두 눈에 뜨거운 눈물들, 한 줄기 강물로 흘러 고된 땀방울 함께 흘러…”

교차로 한복판, 음향시설에 발전차량까지 딸린 8톤짜리 대형트럭 위에서 우리 노래패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을 비롯한 남녀 가수들이 노래를 시작하면서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습니다. 마이크는 여덟 명이 잡았지만 최소 오만 명 이상이 함께 부르는 거대한 합창이었습니다. 

‘그날이 오면’에 이어 ‘솔아 푸르른 솔아’, ‘광야에서’ 같은 비장미 넘치는 곡들이 계속되면서 원로민주인사, 대학생 할 것 없이 눈물을 닦았습니다. 나도 자꾸만 감격의 눈물이 나는 것을 참으며 온 정열을 다 해 노래를 했습니다. 내 30년 가수 생애에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한 기억은 없습니다. 아니, 그 많은 사람들과 합창을 한 기억이 없습니다. 우리 노래패 노찾사의 절정기요, 내 생애의 절정기였습니다.

당시 제가 속한 노찾사는 민중가요운동의 대표적인 노래패였습니다. 서울대 ‘메아리’ 고려대 ‘노래얼’ 이화여대 ‘한소리’ 성균관대 ‘소리사랑’등의 졸업생들이 가수 김민기 씨의 도움으로 1984년 12월 음반 <노래를 찾는 사람들1>을 발간하면서 노찾사라는 이름이 만들어졌고 유월항쟁 직후인 1987년 10월 첫 대중공연을 가지면서 정식으로 노래패로 결성되었지요.

1989년 비약적으로 민주화가 진행되고 있던 시기에 힘입어 노찾사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2>를 발매해 인기가 더욱 치솟았습니다. 김광석, 안치환, 문승현, 문대현 등이 참여한 이 음반은 제가 알기로 수십만 장이나 팔려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에도 들어갑니다. 대표곡인 ‘솔아 푸르른 솔아’는 역시 인기가요 순위를 매기는 여러 방송프로그램에 최상위까지 진출하기도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랑타령이 주류인 대중가요의 흐름에 비하면 경이로운 기록이었지요. 

제가 오디션에 합격해 노찾사에 합류한 것도 이 시기였습니다. 가수지망생들 사이에 노찾사의 인기가 대단할 때라 무려 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들어갔답니다. 

막상 들어가 보니 힘들더군요. 우리를 부르는 곳은 대부분 운동권의 집회장이나 문화공연이어서 거의 돈이 되지를 않았죠. 어떤 달은 한 달에 스무 번 넘는 공연을 위해 낡은 봉고차를 타고 전국을 누비고 다녔지만 다들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어요. 때문에 치열한 경쟁을 뚫고 들어왔다가도 몇 달 만에 그만 두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노찾사가 대중적으로 유명해지니까 오디션을 보면 운동권 출신이 아닌 보통의 가수지망생들이 많이 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일단 가창력으로 뽑히더라도 노찾사의 활동이 민주화운동의 일환이라는 의무감을 갖기도 어렵고 돈도 못 버니 오래 버티기가 힘들죠. 한두 달 만에 그만 두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노찾사를 거쳐 간 이들이 아마 백 명은 될 겁니다.

강경대 노제가 있던 무렵의 노찾사는 문진오, 권진원 등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백 명도 넘는 그 많은 이름을 다 나열할 수 없어 유감입니다.

당시 노래패가 노찾사만 있던 건 아닙니다. 노제가 있던 그날도 ‘예울림’ ‘노동자노래단’ 등 노래패가 차례로 음향차에 올라 열창을 토해냈습니다. 다른 노래패 가수들의 생활형편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다들 민주화투쟁을 한다는 기쁜 마음으로 혼신을 다했죠.

우리 노래패들에게 노래는 무기였습니다. 우리의 웅장하고도 절절한 노래들이 시위군중의 심장을 뛰게 하여 머리끝까지 피를 돌게 하는 역할을 했지요. 시위대는 노래를 부르며 자신들 앞을 막아선 독재정권의 공권력에 대한 공포심을 잊고, 하나의 마음이 되어 최루탄과 쇠파이프가 난무하는 지옥 속으로 전진해 갔습니다. 노래의 역할이 얼마나 큰가를 잘 보여주던 시대였지요.

“시청 앞 광장으로 행진해 노제를 거행한 후 장지인 광주로 이동하겠습니다. 동지 여러분, 시청으로!”

주최 측의 방송에 따라, 추모제를 마친 군중은 서울시청으로 가기 위해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강경대의 커다란 영정사진과 유해를 실은 차량을 앞세워 숫자를 헤아릴 수 없는 만장들을 든 거대한 행렬이 아현동 고개를 향해 출발했지요.

노래패들은 시위에 직접 참가할 겨를이 없는 게 보통입니다. 악기와 장비들을 챙겨야 하니까요. 기타니 음향시설을 들고 돌과 화염병을 던질 수는 없잖습니까? 그러나 그날은 우리 노래패도 다수가 시위에 참가했습니다. 서울시청에서 노제를 지내기로 하여 우리도 그곳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경찰이 시청으로 가는 모든 도로를 봉쇄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길이 뚫려야 우리도 공연이 가능하니 함께 싸우기로 했습니다. 후배가수들에게 장비를 보호하라 부탁하고 저도 시위대열에 합류했지요. 최루가스를 막기 위해 치약을 바른 마스크를 쓰고, 운동화 끈을 단단히 매고서요.

예나 지금이나 대한민국 경찰의 시위방어 전술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2015년이 된 요즘, 시위만 일어나면 시내 일원에 수백 대의 경찰버스로 차벽을 세워 국제적 뉴스거리가 되고 있는데, 25년 전인 그때 벌써 그 단초가 보입니다.

제가 시위 군중을 뚫고 앞쪽으로 가보니 정말 가관이더군요. 이화여대 입구 6차선 도로에는 철제 바리게이트 150개를 쌓은 후 쇠사슬로 묶어 놓은 다음 5미터짜리 H빔 12개까지 설치해 도로를 차단했어요. 게다가 시위대가 개별적으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헤아릴 수도 없이 최루탄을 퍼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위대는 용감했습니다. 내가 갔을 때 일부 용감한 청년들이 자욱한 최루탄 가스를 무릅쓰고 달려 나가 철구조물에 밧줄을 걸어 잡아당기고 있더군요. 

 “영차! 영차!”

맞으면 큰 부상을 당할 수도 있는 직격최루탄이 난무하는 가운데 위험을 무릅쓰고 싸우는 그들을 보니 제 피도 끓어오르더군요. 어디서든 노제가 이뤄지면 노래를 해야 하는 저는 목청을 보호하기 위해 맨 앞에 나설 수는 없는 대신, 뒤쪽의 시위군중 앞에 서서 선창을 했습니다.

 “거센 바람이 불어와서, 어머님의 눈물이 가슴속에 사무쳐오는 갈라진 이 세상에, 민중의 넋이 주인 되는 참세상 자유 위하여 시퍼렇게 쑥물 들어도 강물 저어 가리라…”

노찾사의 대표곡 중 하나인 ‘솔아 푸르른 솔아’였습니다. 거친 시위현장의 노래로는 느린 곡조지만 이미 다들 최루탄과 격한 감정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제 앞의 수십 명이 합창을 시작하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노래하기 시작해 백 명, 천 명으로 늘어나더군요. 저도, 시위대도 다같이 울면서 목이 터지게 민주주의여 오라고 외쳤습니다.

화염병의 검붉은 불꽃과 시커먼 연기가 자욱하고 최루탄과 보도블록조각이 가득 날아다니는 아스팔트 위에서 부른 그 노래가 내 생애 가장 감동적인 노래였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존엄을 위해 자기를 헌신하는 순간만큼 아름다운 시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민주화란 몇 개 조항의 법률로 박제화 될 수 없는, 인간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진행될 수밖에 없는 항구적인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최루탄 가스와 날아다니는 돌멩이에 둘러싸여 노래를 해야만 했던 그 시대는 갔지만, 완전한 민주주의를 위한 노력은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될 겁니다. 우리들의 노래도 계속될 겁니다. 

글 안재성

1989년 장편소설 <파업>으로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이후 대표작으로 <사랑의 조건>, <황금이삭>, <경성트로이카>, <연안행>,등의 장편소설과 <이현상 평전>, <박헌영 평전> 등의 인물평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