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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지성사를 풍미한 재야 경제학자 박현채
대학가와 지식인 사회를 휩쓴 《민족경제론》 현상
1978년 4월의 어느 날, 서울시 소재 대학의 철학과 2학년생 Y는 복학생 선배 K가 동아리방에 들어오자마자 호들갑스럽게 물었다.
“형! 얼마 전 놀라운 경제학 책이 하나 나왔는데, 혹시 봤어요?”
“어, 이 책 말이지? 며칠 전 서점에 갔다가 신간 코너에서 발견하고는 얼른 샀지.”
선배 K는 가방에서 책을 꺼내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가 꺼내든 책은 재야 경제학자 박현채의 저서 《민족경제론》이었다. 이 책은 경제학 책으로서는 드물게도 출시된 지 얼마 안 되어 초판 5,000부가 판매될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근데, 형! 이 책에는 박정희 정권이 내세운 자립경제론의 허구성이 잘 드러나 있는데 왜 판매금지 조치를 하지 않을까요?”
“좋은 지적이야. 박 정권이 재벌 중심의 경제성장을 추구할수록 그 강한 매판성 때문에 오히려 비자립적이라는 박현채 선생의 날카로운 비판을 보면서 나도 후련함을 느꼈지. 아마도, 검열하는 놈들의 독해 수준이 떨어져서 핵심적인 부분을 얼른 잡아내지 못한 것 아닐까? 후훗.”
고개를 갸웃하는 Y의 질문에 K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답변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책은 출간 석 달 만에 정부 당국으로부터 판매금지를 당했다. 하지만, 이미 대학가에서는 복사본이 꾸준히 돌아다니며 독자들의 저변을 넓히고 있었다.
박현채는 서문에서 “자립적 민족경제의 확립을 위한 길은 생활하는 민중의 소망에 따라 국민경제의 내용을 정립하는 것”이라고 썼다. 당시 한길사의 편집자였던 김학민은 박현채의 원고를 정리하고 교열하면서 이 책의 서문에 나타난 민족의 개념, 그리고 본문 전체를 관류하는 경제에 관한 폭넓은 해석과 담론을 깊이 인식한 뒤 저자의 동의를 얻어 책 제목을 ‘민족경제론’으로 지었다. 정작 본문에서는 민족경제론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았지만, 눈 밝은 편집자의 작명에 의해 적확한 제목이 탄생한 것이다. 훗날 ‘민족경제론’은 한국 경제학계의 학술용어로 정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구성체 논쟁의 중심 담론을 형성하는 귀중한 개념어가 되었다.
당시 대학가 최고의 화제작은 리영희의 《전환 시대의 논리》(1974년), 《우상과 이성》(1977년)이었다. 여기에 1978년 한 해 동안 박현채의 《민족경제론》, 한완상의 《민중과 지식인》, 강만길의 《분단 시대의 역사인식》이 4월부터 8월 사이에 잇달아 출간됨으로써 1970~80년대 한국 지성사의 황금기가 활짝 열렸다.
유신정권의 몰락 이후 5·17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5공 정권은 박현채가 《민족경제론》에서 설파한 “경제 외적 강제로 매개된 수탈은 직접적 생산자로서의 민중을 빈곤에 짓눌리게 하는 중요한 경제적 조건”이라는 대목을 문제 삼았고, “곧 역사는 민중의 생활이며 경제의 직접적 담당자는 민중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노동의 성과에 정당하게 참여하는 것을 거부당해왔다.(중략)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민중에의 보다 많은 경제 잉여의 귀속이 새로운 것, 보다 창조적인 것을 약속한다는 것을 뜻한다.”라는 문장을 통째로 삭제하는 조건을 달아 ‘검열필’을 부여했다. 수난을 겪은 뒤 다시 세상에 나온 《민족경제론》은 대학생들의 필독서로서 자리 잡았고, 이른바 ‘민경’이라는 약칭으로 불릴 만큼 지성인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으며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한국 사회에서 대표적인 진보 경제학자로 떠오른 박현채의 저서 《민족경제론》은 일본 학계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보일 만큼 탄탄한 경제 이론서로서 각광받기에 이르렀다.
소년 빨치산에서 경제사상가의 반열에 오르다
박현채는 1934년 11월 3일 전남 화순군에서 태어났다. 그의 외가 쪽에는 독립운동가들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이모부는 박헌영과 함께 활동했으며 당숙은 사회주의운동에 몰두했다. 이러한 집안의 영향으로 박현채는 어릴 적부터 민족 해방과 사회주의운동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었다.
1946년, 수창국민학교 6학년 때 독서회에 가입한 박현채는 최충근 선생의 지도를 받으면서 에드거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을 읽는 등 또래에 비해 수준 높은 독서열을 보였고, 학생자치위원장을 맡아 학교 유리값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동맹휴학을 주도할 만큼 리더십도 뛰어났다. 이듬해 광주 서중에 합격한 그는 독자적으로 서클을 만들어 활동했고 민애청 학년위원(1학년 조직책)에 선임돼 시위 및 삐라 살포와 횃불투쟁 등을 이끌어 나갔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 열일곱 살의 박현채는 빨치산으로 입산해 광주지구 부대원이 되었다. 이때 지리산에서 만난 광주서중 교장 박준옥을 평생의 스승으로 모셨으며, 스무 살 미만으로 구성된 소년돌격중대 문화부 중대장으로 뽑혀 활동했다. 2년 뒤 산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체포된 그는 화순경찰서에 갇혔고, 부모님의 온갖 노력 끝에 석방되었다. 그의 독특한 이력은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 소년 전사인 조원제의 모델로 형상화되었다.
1954년, 스물한 살의 늦깎이로 장성농고에 들어간 그는 전주고등학교 3학년으로 편입해 이듬해 5월 졸업했고,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1950년대 후반 무렵 안병직, 정윤형, 전철환 등과 더불어 후진국연구회 서클을 만들어 공부했으며, 졸업 후 서울대 상과대학 대학원 이론경제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원생이던 그는 한국농업문제연구회 연구원 모집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해 연구원으로 일했다.
1961년 박현채는 〈자본주의와 소농 경제〉라는 논문을 써서 서울대 대학원 경제학과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이화여대 사범대를 졸업한 김희숙과 결혼했으나 그해 말쯤 병역법 위반으로 청량리경찰서에 피검, 군법회의에 송치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
이즈음 서울 상대 교수들이 박현채를 서울 상대 전임강사(교수)로 채용하기로 한 결정이 인사위원회에서 통과되었다. 발령장 수령을 앞둔 상황에서 그를 환영하는 회식 자리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박현채는 선배 전임강사들의 아니꼬운 태도와 귀에 거슬리는 말투를 참지 못하고 상을 뒤엎는 소동을 일으켰다. 결국 서울대 교수 자리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박현채는 평소에 사리에 맞지 않거나 옳지 않은 언행을 한 사람에 대해 적당히 타협하지 않는 거친 근성으로 인해 ‘장비’라는 별칭이 붙었다. 하지만, 후배들을 자상하게 대하는 등 인정 넘치는 면모로 인해 그의 주변에는 다재다능한 인재들이 모여들었고 그는 이들과 폭넓게 교우해 나갔다.
이후 그는 서울 상대, 농협대, 국학대 등에 시간강사로 출강하는 등 자신의 표현대로 평생 ‘보따리장사’의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갔다. 이즈음 서울 상대 학생 서클인 후진경제연구회가 박현채를 초청했는데, 그는 이 모임에 나가 젊은 후배들과 열정적으로 토론하며 연구 활동을 계속했다.
1964년 들어 중앙정보부가 인혁당사건을 조작 발표했을 때, 박현채는 중앙정보부와 검찰에서 각각 20여 일 동안 취조를 받으면서 잔인한 고문과 구타를 당했다. 이듬해 1월에 무죄 선고를 받은 박현채는 도예종에 대한 은닉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서울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출옥 후 그는 또다시 서울대, 홍익대, 국민대, 경희대, 충남대, 한신대 등의 시간강사로 밥벌이를 했다.
1970년대에 ‘민족경제론’의 포문을 열었던 박현채는 1985년 《창작과비평》 가을호에 발표한 〈현대 한국 사회의 성격과 발전 단계에 관한 연구(1)〉라는 글을 통해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를 뜨겁게 달군 ‘사회구성체 논쟁’의 단초를 제공했다.
정력적인 글쓰기를 통해 경제학계에 묵직한 문제점을 던진 그는 1987년 제2회 단재학술상을 수상했고, 56세이던 1989년 조선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취임하여 평생 처음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1992년 한국사회연구소와 한겨레사회연구소를 통합한 한국사회과학연구소를 창립해 공동이사장을 맡게 된 그는 이즈음 경제 문제에서 민중문학으로까지 관심 범위를 넓히면서 경제사상가로서의 면모를 아우르게 되었다. 평생 쓴 글이 논문을 비롯해 1,368편에 달할 만큼 왕성한 집필 활동을 했던 박현채는 62세이던 1995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치열했던 경제학자의 삶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