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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 상계동 철거민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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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에 걸쳐 공권력과 싸운 목동 철거민

1983년 4월 12일, 서울시가 “앞으로 강서구 목동과 신정동 지역에 136만 평의 신시가지를 조성할 계획이다.”라는 장밋빛 청사진을 발표했다. 당시 행정구역상으로 강서구에 속해 있던 목동과 신정동을 포함한 신시가지계획은 개발지역의 땅을 서울시가 전량 사들이는 ‘토지공영개발’ 방식으로, 3만 가구 규모의 주택단지를 개발하여 임대주택단지를 건립하고 서민과 중산층을 위해 10평~60평 규모로 다양하게 분양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1964년부터 당시 여의도, 영등포, 회현 등 서울 시내 여러 곳의 무허가 주택에서 살다가 집이 철거되면서 쓰레기차에 실려 ‘쓰레기처럼 버려진’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무허가 판자촌을 형성하며 살았다. 이때부터 이들은 안양천을 옆에 끼고 형성된 긴 뚝방촌에 모여 살게 되었다.

5월 11일, 서울시는 돌연 “목동에 10~15평의 서민형 아파트 대신 20~58평형의 아파트를 짓겠다.”라며 한 달 전과는 판이한 내용을 발표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신들은 무허가 건물에서 살고 있다. 지금껏 살게 해준 것을 감사히 생각하라. 다만 배려 차원에서 가옥 당 이주비 50만원과 아파트 입주권을 줄 것이며, 입주권이나 이주비는 철거 확인 후에 주겠다.”라고 폭탄선언을 했다.

전두환 정권은 다가올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재정을 확충하고자 당시 김성배 서울시장에 압력을 넣었다. 이에 김 시장은 당초 입안한 10~15평의 서민형 아파트 대신 20~58평형의 아파트를 짓겠다고 계획을 변경한 것이다. 두 개의 국제 스포츠 행사를 보러 오는 외국인들이 서울의 관문인 김포공항에 도착할 때, 비행기에서 내려다보이는 판자촌의 살풍경함을 보이고 싶지 않은 고위층의 속셈 때문에 빚어진 촌극이었다.

작은 평수의 서민형 아파트에 입주할 꿈에 부풀었던 목동 거주민들은 난생처음 생존권 투쟁을 위해 뭉쳤다.
“모이자! 목동 성당으로!”
6월 6일, 김수환 추기경이 목동 성당을 방문해 철거대책위원회 대표들을 만나 격려해 주었고, 빈민운동가로 활동하던 제정구가 목동 거주민들을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8월 22일, 서울시는 “가장 작은 20평형이 2,100만원”이라는 내용의 1차 아파트 분양 가격을 발표했다. 8월 27일, 가난한 주민들은 서울시 발표에 항의하기 위해 안양천변 축구장에 모여 서울시장을 만나 따지러 시청을 향해 행진했다.

천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대가 김포가도를 거쳐 양화대교에 이르렀을 때 전투경찰이 이들을 제지했다. 시위대가 연좌 농성에 돌입하자 이날 밤, 경찰이 폭력적으로 시위대를 진압했다. 최루탄을 맞은 할머니가 실신하고 부녀자들이 폭행당했으며, 100여 명이 닭장차에 실려 갔다.
“폭력 경찰 물러가라! 철거민도 사람이다! 연행자를 석방하라!”
늦은 밤이었지만 주민들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구호를 외쳤다. 그들이 오목교에서 목동 거리 쪽으로 행진하며 시위를 벌이자, 이들을 막아선 경찰이 주민들을 무차별 구타하며 마구 끌고 갔다.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가 목동에 대한 실상 조사 결과를 시민들에게 알렸고 서울대, 이화여대 등에서도 목동 시위의 경과와 동기를 학보에 게재해 대학생들의 지지를 받았다.
서울시의 철거반이 들이닥쳐 판자촌을 뒤엎는 일이 발생하자, 물러설 곳이 없는 주민들은 시위로 맞섰다. 경찰의 무차별 구타와 폭행으로 수많은 부상자가 속출했다. 주민들은 여의도 신민당사를 점거하여 5일 동안 단식 농성을 벌였다. 1984년 11월 22일 오후 5시경 서울대, 연세대, 이화여대 학생 수백 명이 목동 오거리에서 철거민들과 함께 시위를 펼쳤다.

1985년 3월 20일 오후 6시경 오목 네거리에서 수백 명의 학생들이 주민들과 대대적인 시위를 감행했다. 몇 시간 동안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치열한 공방전이 거듭되는 동안 주민들은 목이 터지도록 외쳤다.
“주민의 생존권을 보장하지 못하는 군사정권 물러가라! 대한민국 국민임을 포기하겠다!”
무려 3년간 지속된 목동 투쟁 결과 가옥주들은 처음으로 무허가 주택의 재산권을 인정받았고, 세입자들은 10평짜리 임대아파트 입주권과 저렴한 이자의 이주비용 융자 약속을 받았다. 목동 거주민들의 기나긴 생존권 투쟁이 끝난 뒤, 입주권을 끝까지 거부하고 생활 터전을 요구하던 105세대는 빈민운동가 제정구의 주선으로 현재의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으로 이주했다. 엄혹했던 군사정권에서 거둔 목동 주민들의 값진 승리였다.

명동성당에 둥지를 튼 상계동 철거민

1986년 6월 26일, 상계동 173번지에서 처참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전투경찰과 백골단, 용역 깡패들이 동시에 들이닥쳐 철거민촌 주민들의 터전인 상계동 판잣집을 덮친 것이다. 전두환 독재정권은 한 해 전부터 서울 외곽 지역의 무허가촌을 갈아엎는 짓을 자행하고 있었는데, 상계동 철거민들을 몰아내는 일은 그중에서도 최악으로 꼽히는 광기 어린 폭거에 해당되었다.
“아아악! 내 아이!”
그때, 한 아주머니가 비명을 질렀다. 백골단과 용역 깡패들은 철거민들을 닥치는 대로 폭행하더니, 항의하던 한 아주머니의 아이를 공중으로 던져 버린 것이다. 높이 날아갔다가 멀찌감치 떨어진 아이는 금세 피범벅이 되어 버둥거렸다.
“야, 이 짐승만도 못한 놈들아! 이 살인자들아!”
아주머니가 기절해버리자 옆에 있던 남편이 부들부들 떨리는 음성으로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백골단은 골목골목을 헤집고 다니며 두어 명의 아이를 화풀이하듯 연달아 공중으로 던져버렸다.

이미 판자촌은 형편없이 부서지고 짓이겨지고 있는 가운데, 부모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괴성처럼 터져 나오고 있었다. 용역 깡패들은 상계동 철거민촌을 돕기 위해 와 있던 수녀들의 가운을 벗기고 머리채를 잡고 끌어냈다.
“추기경님! 큰일났어요. 지금 용역 깡패들이 상계동 철거민촌을 짓밟고 있고, 우리 수녀님들까지 마구 두들겨 패고 있어요. 빨리 와주세요, 네?”
보다 못한 상계동 성당의 손인숙 수녀가 김수환 추기경께 전화를 걸었다. 얼마 후, 김수환 추기경이 이 아비규환의 현장에 직접 찾아와 멈춰줄 것을 호소했지만 기세등등한 전투경찰, 백골단, 용역 깡패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은 수십 대의 트럭을 동원해 천막과 살림살이까지 몽땅 싣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전두환 정권은 1982년 말 새 주택정책의 일환으로 합동재개발을 도입했다. 담당 공무원은 “먼저 무허가 불량 주택의 재개발에 거대 건설업체를 끌어들일 예정입니다. 주민들이 조합을 결성한 다음 토지를 제공하고, 건설업체는 참여조합원으로 아파트를 지어 조합원에게 배정한 뒤 나머지는 일반분양하는 방식입니다.”라고 홍보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이 말은 사탕발림에 지나지 않았다. 합동재개발로 불이익을 받은 것은 재개발지역 주민들이었다. 가장 먼저 투기꾼과 용역 깡패들이 철거민촌에 대거 몰려들었고, 상계동 달동네 사람들은 생존권을 모두 잃은 채 맨몸으로 쫓겨나야 했다. 이 모든 게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앞두고 도시 미관상 보기 싫다는 이유로 서울 시내 판자촌들을 강제 철거하도록 명령을 내린 전두환 정권의 입맛 때문이었다.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상계동 철거민 80여 세대는 명동성당으로 몰려갔다. 성당 한쪽 구석에 텐트를 치고 장기 농성전에 들어갔다. 성당 벽에는 플래카드를 걸어놓았다.
“우리는 쫓겨났다. 어디로 가야 하느냐?”
전투경찰과 백골단, 용역 깡패들, 그리고 그들의 주인인 전두환 정권은 상계동 철거민들을 짓밟고 버렸다. 하지만 성당은,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은, 사제와 신자들이 믿는 하느님은 철거민들을 버리지 않고 보듬어 주었다.
상계동 철거민들이 추운 겨울과 봄을 연이어 맞이할 때 거리의 시위도 격화되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는 물결은 거대한 파도가 되어 소공동과 회현동으로 밀물져왔고, 급기야 명동성당에까지 파도처럼 휩쓸려왔다. 박종철고문치사사건과 이한열 피격 을 거치면서 6월민주항쟁은 강고한 적의 무릎을 꿇게 했다.
그 후, 명동성당을 나온 상계동 철거민들은 남양주의 배 밭이나 부천의 고강동으로 쫓겨났다. 공무원들은 고강동으로 올림픽 성화가 지나간다는 구실을 붙여 뼈대만 세운 가건물 마저 철거해 버렸다. 철거민들이 땅굴을 파고 살게 된 어느 날, 올림픽 성화가 5분 만에 그곳을 지나갔다. 군사독재 시절의 끝자락에 벌어진 비정한 소극(笑劇)이었다.

글 박선욱(시인, 평전작가)

1959년 나주 출생. 1982년 시 〈누이야〉외 3편이 실천문학 제1회 신인작품으로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이후 대표작으로 《그때 이후》《다시 불러보는 벗들》《세상의 출구》《회색빛 베어지다》 등의 시집과 《채광석 평전》《김대중 평전》《황병기 평전》《윤이상 평전》 등의 인물평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