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로고

글자 크기 조절

여성평우회, 오래도록 기억될 4년의 역사

  • 공유하기

여성 대중의 힘을 모아 '여성 해방'을 

여성평우회는 1983년 6월 18일 창립하여 87년 8월 해산하였다. 햇수로 4년을 조금 넘겼을 뿐이고, 게다가 이른바 '논투(이론투쟁)'라고 불린, 단체의 활동방향을 둘러싼 이론투쟁으로 1년 정도를 보낸 것을 계산하면 사실 3년 정도 활동한 단체이다. 그러니까 아주 짧게 존재했던 단체였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 이름을 기억하고, 그 활동의 역사적 의의를 찾고, 자기 이력의 앞부분에 자랑과 긍지를 섞어 여성평우회 활동을 적는 여성운동가들이 많다. 왜 그럴까? 무엇이 얼핏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한 단체의 이름을 이토록 오래 기억하게 할까?

1983년은 광주항쟁 이후 공포 분위기에서 오는 심리적 위축감을 어느 정도 털어버리고 학생운동, 노동운동이 조금씩 되살아나는 시기, 5공 정권의 유화국면이 전개되려던 시기였다. 그러면서도 여성운동은 여전히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던 시기였다. 여성은 노동자로 농민으로 행상으로 아니면 대식구의 생활을 돌보는 가사노동으로 평생을 쉬지 않고 일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일은 하찮은 일, 쉬운 일, 혹은 ‘본분’ 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을 뿐 그들이 평생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인식되지 않고 있었다. 여성은 법률적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명백한 차별을 겪고 있었지만 이 현실을 근본적으로 타개하려는 움직임도 없었다. 하긴 성차별적 조항으로 가득 찬 가족법의 개정조차 한 발씩 한 발씩 전진할 수밖에 없는 열악한 상황이니 포괄적인 ‘여성해방운동’이야 오죽 하였겠는가. 이러할 때 50명의 젊은 여성이 다음과 같이 한국 여성의 현실을 밝힌 단체 발기 취지문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한국여성은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근로여성으로서, 농사일과 가사노동의 이중 부담에 시달리는 농촌여성으로서, 가난과 폭력의 이중질곡에 빠져 있는 도시빈민여성으로서, 가정에 고립되어 가사노동을 전담하는 도시주부로서 존재한다. 바로 이들 여성의 저임노동과 무임노동의 토대 위에 한국 경제가 성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여성들은 여전히 발전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 여성은 어느 계층을 막론하고 불평등한 대우를 받거나 받아왔다는 공통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 글에서 이들은 여성 억압의 구조와 역사를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여성운동의 방향을 분명히 했다.  

여성은,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이유로 예속적이며 억압적인 삶을 강요당해 왔다. 성별 노동분업을 토대로 형성된 가부장제는 남성의 지배와 여성의 복종을 고정시켰으며, 예속을 미화하는 신화와 이념 그리고 사회화를 통하여 내면화된 여성 열등의식은 남녀 불평등 구조를 유지 강화시켰다. (중략) 여성운동은 모든 비인간적인 요소를 그 대상으로 삼고, 남녀차별만의 문제 해결이 아닌 광범위한 사회개혁운동으로 나가고 있다. (중략) 따라서 여성운동은 일부 여성들의 지위 향상을 위한 운동이어서는 안 되며, 중산층 이상의 여가 선용에 머무른 운동이어서는 더욱 더 안 될 것이다. 여성운동은 전 여성의 인간화운동이고 우리가 속한 사회의 비인간적 요소를 타파하려는 총체적 운동이어야 한다.

여성평우회는 여성을 억압하고 차별하는 구조를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여성 대중의 힘을 모아 조직적으로 여성해방을 이루고자 했던 해방 이후 최초의 여성단체였다. 이전의 여성단체와 여성운동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여성을 시혜적인 자선사업의 대상으로 보거나 소수 여성의 사회적 지위향상이 전체 여성의 지위향상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평우회의 창립회원 50명은 '40세 이하의, 다른 여성단체에서 활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평우회가 회원을 이렇게 규정한 것은 그들이 출발하고자 한 지점과 기존의 여성운동에 대한 그들의 비판적 관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평우회 사람들은 보수화된 기성세대, 기존의 여성운동에 젖은 여성은 동지로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물론 40세라는 기준을 두고 내부 비판이 있었지만, 어쨌든 그들이 지향하고자 했던 단체의 모습은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여성다움을 강요하는 성적 대상물로서의 여성상과 수동적 존재로서의 여성상을 최상의 가치로 주입하려는 문화적 풍토 역시 여성을 억압하는 요소입니다.’(창립 취지문)라고 밝히고 여성운동이 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운동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여성은 아직 보편적 인간이 아니다 

저 엄혹한 80년대 중반, 새로운 여성운동의 이념을 들고 나온 이 여성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사람들일까?  

1970년대 중 후반 무렵 유신 반대 운동, 노동운동 지원에 앞장섰던 일단의 젊은 지식인 여성들이 있었다. 이들은 전태일의 죽음에서 지식인의 역사적 사명을 깨닫게 된 사람들이었다. 또한 크리스천아카데미 같은 교육기관을 통해 체계적으로 새로운 리더십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생겨났다. 한편에서는 1977년 이화여자대학교에 개설된 여성학 과목을 통해 세계적인 여성학의 흐름, 서구 페미니즘의 향방을 공부한 여성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광주항쟁을 경험한 세대, 억압적인 5공 정권에 저항한 학생운동가 출신들이 광범위하게 있었다. 이 모든 조건들이 여성평우회의 젊고 헌신적이고 지적이면서도 민중친화적인 여성들이 등장한 배경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념에 맞게 조직을 운영하고 사업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독특한 것이 공동대표제였다. 대표였던 조형 당시 이화여대 교수에 의하면, 영향력 있는 소수에 의해서 장악되기 쉬운 운동단체의 약점을 근본적으로 제거하고자 임기제와 3인 공동대표제를 시작했고 이를 통해 조직의 수평적 민주주의를 확보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이것은 이후 많은 시민단체의 본보기가 되었다. 다음은 재정인데, 평우회는 완전한 재정자립을 달성한 보기 드문 단체였다. 재정의 1/3을 회원들의 회비로 충당할 정도로 회원의 재정의무가 철저했고 납부율도 좋았다. 그 외의 비용은 자체 사업- 참기름, 티셔츠, 수첩 등을 판매-과 기금을 모아서 해결했다. 

평우회의 활동 가운데 특이했던 것은 공부방 사업이었다. 빈민 여성과 어린이를 위한 공부방이라는 개념이 거의 전무하던 시절, 평우회는 루핑지붕으로 가득 찼던 빈민가 중의 빈민가 인천 만석동에 「큰물공부방」을 만들어 일하는 여성의 짐을 나눴다. 동시에 방임되어 있던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 사업은 지역에 가족 전체가 이주해서 살면서 헌신적으로 사업에 임했던 홍미영 회원 덕에 커다란 성과를 냈고, 이후 여성단체는 물론 전체 시민운동사회에 큰 영감을 주었다. 

평우회는 회원과 일반 여성의 교육에 열정적이었다. 그들이 열었던 여성학교실은 이전의 여성교육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내용이었다. 여성은 25살이 넘거나 결혼하면 퇴직하는 것이 당연시 되던 현실에서 평생 고용, 가사노동의 경제적 가치, 제3세계 여성노동의 구조, 한국현대사와 여성운동 등을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 자리는 많은 여성들에게 단비처럼 반가운 자리였다. 조사연구 활동도 괄목할 만 했다. 가족법 개정 반대론자들은 가족법이 5천년 우리 역사의 고유 전통이라고 주장했으나, 평우회는 호주제가 일제 강점기에 천황제와 결합한 형태로 이식된 일제의 잔재라는 것을 처음으로 학술적으로 밝혔다. 또한 여성해방운동을 위한 교재, 자료를 열성적으로 펴냈고, 평우회가 정기적으로 발간하는 「여성관계문헌목록집」은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이 여성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이들은 이론과 학습에만 치중하지 않았다. 한국여성운동사의 주목할 만한 몇 개의 장면은 평우회가 만들어 낸 장면이었다. ‘25세 정년퇴직제’를 철폐하기 위한 소송과 언론전, 성도섬유 여성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지원하기 위해 톰보이(성도섬유) 매장 앞에서 벌인 불매운동. 이는 지식인, 학생, 노동자의 연대 투쟁이었고 이 연대는 이후 여성운동과 학생운동의 방향을 가르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또 하나는 문화운동이었다. 평우회는 일하는 여성을 역사의 주체로 다시 보는 관점에서 사진전, 연극, 공연 등 다양한 문화 활동을 했고 여성해방은 가부장적 문화에 균열을 내는 것에서 온다고 생각하여 노동쟁의 현장, 3.8여성의 날 기념식장, 지방의 극장 등 다양한 곳에서 여성문화큰잔치 등 새로운 문화운동을 펼쳤다.

3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역사적이라는 평가를 받아 마땅한 수많은 활동을 했지만 평우회는 87년 8월 해산 성명서를 끝으로 단체를 접었다. 그들이 해산하기 까지 겪은 진통은 당사자들에게는 아픈 기억이기도 했다. 해산으로 갔던 그 ‘논투’의 배경은 당시의 타 운동부문처럼 한국사회의 모순과 운동방향을 둘러싼 일종의 사상투쟁이었다. 군부독재타도를 운동 목표로 할 것인지, 이른바 ‘제헌의회(CA) 결성’을 목표로 할 것인지, 여성대중에 기반 하는 조직을 유지해야 할 것인지 등을 두고 벌어진 회원들 간의 이론투쟁이 결국 조직의 해산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여성평우회의 간판은 내려졌지만 평우회의 정신은 사라지지 않았다. 평우회의 여성들은 각각 민들레 홀씨처럼 퍼져나가 그 후 여성민우회, 여성노동자회 등 한국 역사 상 중요한 여성단체들을 결성했고, 문화운동 단체를 만들어 냈다. 그들은 정치와 사회, 여성운동 등 각 분야에서 지워지지 않을 기록들을 만들어낸 것이다.   

글  정영훈 
자유기고가. 방송작가. 인터뷰 작가. (사)한국여성연구소 부소장. 여러 매체를 통해 인간과 세상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고 있다.「새길에서 만난 사람」「여성, 나를 말하다」「얼지마, 죽지마, 페미니즘」「한국여성운동구술기록사업」「우리 젊은 날- 구로공단이야기」등 다양한 글과 영상물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