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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운동과 빈민선교로 민주화운동 이끌어간 박형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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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중반의 어느 추운 겨울날, 다닥다닥 붙은 서울의 한 산동네에서 라면상자와 연탄을 전달하던 중년 남성을 바라보며 두 아낙이 소곤거렸다.

“저 양반 목사 맞아?”

“글쎄, 성경책 가방을 항상 들고 다니는 걸 보면 목사가 맞기는 맞는 것 같은데...”

산동네의 두 아낙네가 궁금해 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 무렵 빈민선교에 앞장서던 박형규 목사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만 외치는 부류의 목사와는 사뭇 달랐다. 만나면 늘 조용한 어조로 “요즘은 좀 어떠십니까?”라며 살갑게 안부부터 물으니, 저절로 예수를 믿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따뜻한 미소와 친절한 보살핌의 태도가 몸에 밴 그는 초대교회의 정신으로 돌아가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아낙들이 ‘우리들이야 고맙지만 박 목사님네 교회는 언제 부흥될까?’ 하고 걱정하기에 이를 정도였다.

1923년 경남 창원군(지금의 마산)에서 태어난 박형규 목사는 독실한 크리스천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일곱 살 때부터 기독교학교에 다녔다. 1959년 4월 한국기독교장로회 서울노회 공덕교회 부목사로 부임하며 목회활동을 시작했다. 평범한 목회자였던 박형규 목사에게 인생의 전기를 가져다준 것은 1960년 4.19혁명이었다. 당시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근처에서 결혼식 주례를 마치고 나오던 박 목사는 이승만 정부의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면서 데모하던 학생들이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것을 눈앞에서 직접 보면서 깊은 충격에 빠졌다.

그는 “십자가에서 피를 흘린 예수나 저 학생들이나 뭐가 다르단 말인가”라며 훗날 저술한 회고록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에서 당시의 심경을 밝힌 적이 있다. 그는 이때 직접 목격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들것에 실린 학생들이 피 흘리는 모습을 보았을 때, 무언가 내 머리를 강하게 내리치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에게서 나는 십자가에서 피 흘리는 예수의 모습을 보았다. 하나님의 진노(震怒)가 쏟아지는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이었다.”

박형규 목사는 여태 안일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을 통렬히 반성하고 큰 깨달음을 얻는다. 그는 나아가 앞으로 참되게 거듭나는 삶을 살아갈 것을 다짐하며 다음과 같은 각오를 다진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행위는 개인 영혼의 구원을 넘어서야 한다. 현실 속에서의 삶의 구원, 사회적인 구원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개인의 삶이 사회 속에서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구원받게 해야 하며, 적극적으로 역사에 참여하여 역사도 구원받게 해야 한다. 아니 그것을 넘어 세계의 구원 자연의 구원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이 같은 각오를 다진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선언과도 같은 한 마디를 던졌다.

“불의한 시대에 성직자가 감옥에 가는 것은 당연하다.”

1967년 한국기독학생회 총무를 맡게 된 그는 1969년 3선개헌에 반대하는 운동을 하면서 장준하, 함석헌 등 재야인사와 김대중, 김영삼 등 야당 정치인들과 연대해 나갔다. 1972년 서울제일교회 담임목사로 임명되어 목회자로서 신망을 받는 한편, 민주화운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1973년 4월 22일 남산야외음악당에서 부활절 예배가 열린 날, 박 목사는 민주주의 부활과 독재정권에 대한 투쟁을 선언하는 성명을 발표한 뒤 당국에 체포되었다. 하지만 극심한 당국의 단속 탓에 박형규 목사는 ‘주여 저 대통령을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내용의 전단지를 다 뿌리지도 못했고, 현수막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유신반대 시위를 계획했다는 이유를 들어 국가내란예비음모 혐의로 박형규 목사를 구속했다. 이것이 그의 첫 번째 투옥 경험이었다.

박 목사는 이때를 계기로 빈민선교와 인권운동에 뛰어들어 ‘길 위의 목사’로 불렸으며, 1973년의 사건을 포함해 무려 여섯 번이나 구속되었다. 당시만 해도 유신정권에 반대하면 무조건 ‘빨갱이’로 몰릴 때였다. 하지만 그 시절 박형규 목사와 문익환 목사가 건재하던 기독교는 함세웅 신부를 비롯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품은 가톨릭과 함께 민주화 투쟁을 전개해 나갈 수 있었던 유일 세력이었다. 유신독재 시절이었지만 공산정권에 순교로 신앙을 지켜온 목사들을 빨갱이로 몰기란 쉽지 않았고,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교회에서 한국을 돕는 후원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박형규 목사는 1974년에는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다시 구속되어 징역 15년에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았다. 거사 자금을 댔다는 게 구속 이유였다. 그는 10개월 만에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으나 두 달 뒤 또다시 구속됐다. ‘박형규 목사가 자신이 끌어온 돈을 스스로 횡령했다’는 구실을 붙여 선교자금 횡령 혐의로 구속했다. 그를 파렴치범으로 만들기 위해 서울시경이 꾸민 계략이었다. 10개월 뒤 만기 출소했지만 그에게 시련은 끊이지 않았다.

이후, 청년 학생들을 보호하는 과정에서 박형규 목사는 긴급조치 9호 위반 등의 죄목으로 계속해서 수감 생활을 해야 했다. 1978년 3월 1일에는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회관에서 유신체제를 비판하고 새 민주헌법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내용의 ‘3.1 민주선언’을 발표했다가 기소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87년엔 6월항쟁 선두에서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호헌철폐 범국민대회’를 주관하다 6번째로 수감됐으나 민주화운동 성공으로 한 달 만에 기소유예로 석방됐다.

유신정권 내내 투옥과 출옥을 반복하던 박형규 목사는 5공 시대에 접어들어 교회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전두환 군사정부의 서슬이 퍼렇던 1983년 8월,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와 박 목사를 반대하는 구호를 외치며 예배방해를 시작했다. 국가보안사령부의 사주를 받은 비교인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박 목사가 담임하던 서울제일교회 교인들을 마구 폭행하고, 교회 기물을 파괴하는 등 난동을 부렸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한참 후에야 나타났고, 교회가 아수라장이 될 때까지 방관만 하다가 슬그머니 사라지곤 했다.

심지어는 깡패들이 난입해 박 목사와 교역자 2명, 청년 13명을 무려 60시간 동안 감금하는 일도 벌어졌다. 경찰에 신고했지만 4시간여 만에 출동해 “교회 내부 문제이므로 교회 안에는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하면서 교인들을 교회 밖으로 밀어내기까지 했다. 이후로도 박 목사는 살해 위협을 받는가 하면 대낮에 테러를 당했다.

5공정권이 예배당에도 아예 못 들어가게 하자 박 목사는 교인들과 더불어 길거리에서 노상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 노상예배는 교회 앞에서 시작해 중부경찰서 앞을 향해 ‘정의와 평화를 위한 십자가 행진’을 벌였다. 보안사와 경찰의 노골적인 방해, 깡패들의 일상적인 폭력 행위를 받아 가면서도 노상예배는 6년간 이어졌다. ‘지역교회의 범위를 넘어 시대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크리스천들의 행진’으로 발전해 가는 이 노상예배는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에게 전파되면서 감동을 자아내기도 했다.

독일에서 설교를 하러 찾아온 울리디 두크로우 목사는 노상예배에 대한 감회를 다음과 같이 술회하기도 했다.

“나는 이렇게 큰 교회는 처음 보았다. 서울제일교회가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다. 천장이 없으니 하늘이 천장이고, 벽이 없어 막힌 곳이 없으니 온 세계로 열려 있다. 얼마나 큰 교회인가. 온 우주로 열려 있는 교회다. 이보다 더 큰 교회가 이디 있겠는가.”

평생을 빈민선교와 인권운동에 바쳤으며, 유신정권과 5공정권의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워온 박형규 목사는 1992년 70세에 파란만장한 목회 활동을 은퇴했다. 그후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고문, 남북민간교류협의회 이사장, 노동인권회관 이사장,한국교회인권센터 이사장,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 남북평화재단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2016년 8월 18일 운명했다. 한평생 목회자로서 ‘교회의 교회다움을 실천’하기 위해 저항 운동에 뛰어들었던 박형규 목사는 시대의 아픔에 동참함으로써 오늘날 ‘민주주의의 거목’으로 역사 속에 우뚝 서 있다.

글 박선욱(시인, 평전작가)
1959년 나주 출생. 1982년 시 〈누이야〉외 3편이 실천문학 제1회 신인작품으로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이후 대표작으로 《그때 이후》《다시 불러보는 벗들》《세상의 출구》《회색빛 베어지다》 등의 시집과 《채광석 평전》《김대중 평전》《황병기 평전》《윤이상 평전》 등의 인물평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