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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야 대통령’ 장준하 의문사
포천 약사봉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장준하 선생이 추락사했다고?”
1975년 8월 17일, 동아일보 의정부 주재 기자인 장봉진은 경찰의 제보를 받고 급히 사고 현장으로 뛰어갔다. 포천군 이동면 도평리 소재 운악산 약사봉 계곡이었다. 동행한 사진기자가 민첩하게 플래시를 터뜨리는 사이, 장 기자는 유일한 목격자로 자처한 김용환 씨 인터뷰를 땄다.
“장 선생님이 사고 현장 벼랑 위에 오를 때는 멀리 등산 코스를 돌아 올라가셨습니다. 그렇지만 하산할 때는 등산 코스가 아닌 벼랑으로 내려오려 하셨습니다.”
주변에는 장준하와 함께 등반한 호림산악회 회원들이 여럿 있어서 그들과도 인터뷰했다. 그중의 한 사람이, “어? 김용환 씨가 장준하 선생님 시계를 손목에 차고 있네?”라고 하자, 바로 옆 사람이 “그랴. 묘하네.”라며 갸웃거렸다.
의정부 검찰 지청의 요구에 따라 의정부의 심외과 의사인 심구복이 시신을 검시했다. 시신의 상태는 의외로 깨끗했다. 옷도 찢어진 곳이 하나도 없었다. 꼼꼼히 살핀 뒤, 그는 “직접적인 사망 원인은 오른쪽 귀 뒤쪽에 있는 급소가 예리한 흉기에 찔린 듯한 후두부 함몰에서 기인함”이라는 소견을 발표했다. 장 기자는 수첩에 “추락사인데도 전신에 골절상이 하나도 없음”이라고 썼다. 현장에 있던 경찰은 기자들에게 추락사라고 강조했다.
추락 지점은 경사 75도 높이 12미터가 넘는 깎아지른 벼랑이었다. 추락할 때 긁히거나 찢긴 상처로 만신창이가 될 텐데, 시신에 외상의 흔적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큰 의문점이었다. 전문 산악인들도 장비 없이는 오르내리기 힘든 곳인데도 “등산 코스가 아닌 벼랑을 맨몸으로 내려오려”고 했다는 목격자 진술이 걸렸다. 취재 결과, 장준하는 평소 산을 탈 때 일행들에게 ‘여덟 팔(八)자 걸음으로 내려와야 한다.’고 자주 강조했다는 증언도 확보했다.
18일, 각 언론은 경찰 발표문대로 “장준하가 실족해 추락사했다.”고 보도했다. 장봉진 기자는 보강 취재를 더 한 다음 기사를 쓰기로 했다. 취재에 응한 인근 주민들은 사고 지점을 가리켜 “불과 보름 전에야 군사보호 지역에서 해제된 곳”으로 원래 등반 코스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날 오후, 취재를 마친 장 기자는 기사를 써서 데스크에 넘겼다.
다음날인 19일, 동아일보 사회면 톱으로 「장준하 씨 사인에 의문점 」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실족사로 처리된 죽음에 깊은 의혹이 제기된다.”는 것이 보도의 핵심이었다. 전날의 여러 언론 보도와 딴판인 동아일보 기사로 의정부 지청은 발칵 뒤집혔다. 경찰의 수사 결과를 뒤집는 의혹 보도에 따라 목격자 김용환을 두 차례 소환해 사실 관계를 캐묻는 등 부산을 떨었다. 하지만, 검찰은 기자회견을 통해 “동아일보 보도는 사실과 다르다”며 서둘러 수습하는 태도를 보였다. 나아가 동아일보 의정부 지방부장, 장봉진 주재 기자, 성낙오 편집부 기자를 소환 조사한 뒤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시켰다. 의혹을 부추기는 기사 제목을 뽑은 점, 톱기사로 비중을 키운 점 등이 구속 이유였다.
의혹 기사 보도 이후 추방된 외신 기자 로이 황
동아일보 기자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된 뒤, 한국의 언론은 장준하 사망 사건에 대해 침묵했다. 그로부터 3주 후, 홍콩에 본사를 둔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 서울 특파원 로이 황 기자가 「야당 지도자의 괴사(怪死) 」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그는 장준하 사망을 둘러싼 의혹을 심층 보도하면서, 앞서 장봉진 기자의 기사가 유의미하다는 전제를 깔았다. 로이 황 기자는 목격자를 자처한 김용환의 진술 내용이 석연치 않다면서 그 예로, 오랜 등반 경험을 지닌 장준하가 로프도 없이 깎아지른 절벽을 내려가려 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의혹이라고 지적했다. 김용환의 베일에 싸인 정체, 진술의 신빙성이 의심스러운 점, 장준하의 소지품인 안경, 보온병이 깨지지 않고 온전히 보존된 점도 의혹을 불러일으킨다고 썼다.
로이 황의 기사 가운데 중앙정보부의 심기를 건드린 것은 다음의 대목에서이다.
“담당 의사는 사인이 2인치가량 둥글게 파인 오른쪽 귀 뒤 두개골 밑의 뇌진탕으로 기인한 것”이며, “오른쪽 팔굽 안쪽에 작은 찰과상, 그리고 오른쪽 엉덩이 부분에 큰 찰과상을 입었을 뿐”이고 “그의 의복은 찢어진 것도 없었고 더렵혀지지도 않았”으며 “예리하게 모가 난 바위에 160파운드 무게의 몸이 떨어졌을 때 생겨야 하는 상처가 없었다.”고 적시했다. 로이 황은 “그의 뇌진탕이 무엇으로 해서 일어났는지 말하기가 힘들지만 대단히 강한 힘에 의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했다는 담당 의사의 말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의혹을 제기했다.
“진상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지 모르나 소식통에 의하면 가장 적절한 해석은 장 씨가 깊숙한 나무 사이에서 피살되고 그 후에 그의 시체가 절벽 밑으로 운반되었으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적어도 김씨의 진술과 물질적 증거 사이에 놓여 있는 부조리라는 점을 설명해 준다.”
로이 황은 이어, “김 씨는 사건 얼마 전에 장 씨가 군복을 입은 두 사람과 대화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관한 조사는 행하여지지 않았다.”며 목격자 김용환과 검찰 혹은 경찰 모두가 어떤 강한 힘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는 듯한 암시를 기사의 행간에 깔아놓았다. 그해 10월 3일, 박정희 정권은 로이 황 기자를 국외로 추방했다.
37년 만에 밝혀진 의혹들 - 꺼지지 않는 불꽃
2012년 8월 17일, 장준하 사망 37주기 기일을 앞두고 새로 조성된 묘역으로 이장하기 위해 묘를 파헤쳐 관을 연 순간, 깜짝 놀랄 만한 일이 생겼다. 장준하의 두개골에 마치 둥그런 망치로 가격당한 것처럼 손상을 입은 부위가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장준하 사망 후, 그의 시신을 확인한 검안 의사 조철구 박사가 “두개골에 직경 5~6센티미터가량의 함몰 자국이 보인다.”는 검안 기록을 남긴 것이 그대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이에 대해 법의학 분야에서 국내 최고 권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이정빈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법의학교실)는 “장 선생의 사인은 추락이 아니라 가격에 의한 골절의 가능성이 크다.”며 누군가가 장준하를 “제3의 장소에서 살해한 뒤 시신을 옮겨 온 것”이라고 추론했다.
서슬 퍼런 유신독재의 한복판에서, 바로 그 유신헌법을 타파하기 위해 개헌청원백만인서명운동을 전개했던 장준하. 그는 ‘유신’이라는 말만 언급해도 감옥에 보낼 수 있는 긴급조치 1호에 의해 구속된 첫 번째 사람 중 하나였다.
1944년 일본군에 징집된 장준하는 6개월 만에 탈출해 6천리 대장정을 거쳐 중국 임천에 도착, 중국중앙군관학교 임천 분교 한국광복군 간부 훈련반에서 훈련을 받았다. 이듬해인 1945년 1월 중경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도착한 그는 서안의 한국광복군 제2지대 이범석 휘하에 배속되었고, 유엔군 중국전구사령부 웨드마이어가 지휘하는 OSS 대원으로서 한미합작 특별군사훈련을 받았다. 하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핵폭탄의 위력 앞에 일본이 항복하여 국내 진공이 불발되자, 장준하는 해방의 기쁨보다 국내 진격의 좌절로 통탄을 금치 못했다.
광복 이후 미군정의 요구에 의해 김구 선생 등과 함께 ‘개인 자격’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귀국 이후, 장준하는 오로지 이 땅의 민주주의 회복에 온 힘을 기울이는 투쟁의 대오에 앞장선 지도자였다. 유신독재에 추호도 타협하지 않고 박 정권에 맞서 싸웠던 일당백의 기백은 찬란하다. 장준하는 그로 인해 ‘재야 대통령’의 칭호를 들었으며, 그는 일본군 진영을 탈출할 때 맹세한 바대로 ‘부끄럽지 않은 조상이 되기 위해’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꿋꿋하고 당당하게 살아갔다.
1953년 창간한 월간지《사상계》를 통해 반유신 투쟁의 기치를 내걸었던 장준하는 강고한 어둠과 맞서는 강철 같은 신념과 불굴의 의지로 그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앞날을 밝히는 등불이 되었다. 포천 약사봉 계곡 추모비에 적혀 있듯이 장준하는 “빼앗긴 민주주의의 쟁취, 고루 잘사는 사회, 민족의 자주·평화·통일 운동의 위대한 지도자”로 역사의 큰 봉우리가 되어 있다. 언젠가는 그의 사인(死因)을 반드시 밝혀 후대에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