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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기록으로 보는 2·28민주의거

예정된 대통령 부정선거, 5개월 앞당겨 치룬다니

1960년 제5대 대통령 선거일이 3월 15일로 결정되었다. 대통령 임기보다 5개월이나 앞선 선거였다. 더구나 조병옥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건강문제로 미국에 체류중이었다. 이러던 중, 조병옥이 2월 15일에 미국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대통령 선거전은 사실상 이승만의 독무대가 되어버렸다. 

1960년 2월 16일 점심시간에 경북대사대부고 1학년 교실 칠판에 당시 유행했던 ‘유정천리’의 가사를 바꾼 노랫말이 등장했다. 교실에서 전날 미국에서 급사한 조병옥을 추모하는 소위  ‘노가바(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 사건’이 일어났다. 이 노래는 급속히 퍼져나갔고, 신문에도 실려 전국으로 전파되었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海公)선생 뒤를 따라
세상을 원망하랴 자유당을 원망하랴
장면 박사 홀로 두고 조 박사도 떠나갔다
춘삼월 15일에 조기선거 웬 말이냐
가도가도 끝이 없는 당선길은 몇 구비냐
천리만리 타국땅 객사 죽음 웬 말인가
자유당에 꽃이 피네 민주당에 비가 온다
설움어린 신문들고 백성들이 울고 있네

2‧28민주운동은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의 조직적인 부정선거 획책에 항거하여 발생한 학생운동이다. 일반적으로 2‧28대구민주화운동은 4.19혁명의 시발점이 된 민주화운동으로 그 의미가 정의되고 있다. 1960년 2월 28일 오후 대구 시내 곳곳에서 경북고등학교, 대구고등학교 경북사대부고 경북여자고등학교 대구여자고등학교 등의 학생 1,200여 명이 시위를 전개했다.

박명철(대구공고)의 증언을 통해 2‧28대구민주화운동 직전 대구지역의 여당(자유당)에 대한 민심과 학생들의 눈에 비춰진 당시의 사회상을 여실히 알 수 있다.


"당시 가장 타깃이 됐던 것이 국회의원도 했던 신도환씨라고 대한방공청년단단장이 대구 시내에 살았는데 이분이 자유당 정권의 제일 앞잡이였습니다... 우리가 “신도환이 집에 쳐들어가자”며 외치자 사람들은 쳐들어갔고... 사람들이 우레같이 달려들어 집을 다 부쉈습니다."

일요일 등교해서 토끼를 잡으라니

2월 28일 대구에는 민주당 부통령 후보 장면의 연설이 예정되어 있었다. 집권 여당인 자유당은 당일이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유세에 학생들의 참여를 막기 위해서 각급 학교장을 소집하여 ‘일요등교계획’을 전달하였다. 이에 따라 대구 시내 대부분의 학교는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등교를 지시했는데 명목은 각양각색이었다. 대구여고는 졸업생 송별회와 무용발표회, 경북고는 영화관람, 경상중학교는 졸업식 연습, 대구상업고등학교는 졸업생 송별회와 원서제출, 제일여자중학교는 임시수업, 대구고는 토끼사냥, 경북사대부고는 임시시험, 대구공업고등학교는 학교 자체행사가 등교의 이유였다. 각 국민학교 학생들은 보충수업 등을 이유로 등교해야 했다. 학생뿐 아니라 이날 대구 시내 공장과 회사도 직원을 출근시켰다.

학도호국단 간부연수회의 인연으로 연합시위를 계획하다 

이 지시가 내려진 25일 밤부터 경북고, 대구고, 경북사대부고의 학도호국단 간부 학생들이 비밀 회합을 갖고 일요일 등교 후 항의 시위를 하기로 약속했다. 학도호국단 간부들은 1959년 여름방학 때 포항연수회를 계기로 계속 만나며 같이 활동을 하고 있었다. 또한 대구지역 고등학생들의 농촌봉사활동 연합서클인  ‘새날동지회’를 통한 교류도 큰 힘이 되었다.

민주당 부통령후보 장면의 연설이 예정되었던 28일 일요일, 영화 관람을 이유로 등교지시를 받은 경북고 학생들은 12시 50분 학교에 모였다. 학생들은 결의문을 낭독한 후 교사들의 제지를 무릅쓰고 800여 명이 교문을 나와 거리로 나섰다. 토끼사냥을 이유로 등교했던 대구고등학교 학생들은 800여 명이 오후 2시경 시위에 들어갔고, 경북여고와 대구여고 학생 100여 명도 참여했다. 경북사대부고생들은 시위 계획을 눈치 챈 교사들이 학생들을 강당에 가두는 바람에 오후 늦게 가두시위에 참여했다.

최용호(경북사대부고)는 2‧28대구민주화운동 이전에 대구지역 고등학생의 상호교류에 대한 사실을 알려준다.


"부고는 임시 시험으로 알려졌는데 청소하고 게임하자고 했습니다. 학교마다 다 달랐습니다... 전날인 2월 26일 날 손진홍과 이대우 군이 잠시 만났고 우리 3개교는 2월 27일  저녁에 만났습니다. 만나보니 경북고는 상당히 준비가 되어있었고 대구고도 그날 3,4명이 참여해서 합의를 보면서 대구고등학교도 같이하자고 결정했습니다...당시 부고는 저 혼자였습니다."

수없이 불려다녔던 관제데모의 경험으로 민주화를 위한 거리 시위를 나서다 

학생들은 오후 1시경부터 “학원의 자유를 달라” 고 외치면서 대구 시내에서 시위를 시작했고, 경찰은 시위학생 약 200명을 연행했다. 대구 경찰은 오후 2시경부터 비상경계를 실시하여 도청 경찰국 주위 일대에 새끼줄을 치고 교통을 차단했다. 또한 소집된 정복 무장경찰관과 사복경찰관들을 시내 각 요소에 배치하여 시위 학생들을 발견하는 대로 연행했다. 오후 1시 30분경부터 학생들은 경찰국에 120여 명, 대구경찰서에 약 50명, 남대구경찰서에 80명(여학생 30명 포함)이 연행되었다. 경찰은 밤 10시경에 도지사 관사 앞에서 연행된 경북사대부고 학생 4명과 시위 주동자로 알려진 경북고 이대우 등을 훈계·방면하였다

홍종흠(경북고)는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그 다음에 ‘도청으로 가자’는 얘기가 있어 지금의 감영공원으로 갔습니다...  주력 시위대는 시청으로 향했고 가기 전 왼편에 자유당 경북도당 즉 자유당의 최고 본부가 그곳에 있었는데 그 앞에서 ‘자유당은 각성하라’고 구호를 외쳤고, 그 다음으로 시청에 가서 구호를 외쳤습니다."

오픈아카이브는 대구2.28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박명철(대구공고), 장주효(대구고), 최용호(경북사대부고), 성유보, 안효영, 홍종흠(경북고)의 구술 요약과 짧은 동영상을 서비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