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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기록으로 보는 3·8민주의거

  • 등록일자 : 20/03/05

3·8민주의거는 1960년 3월 8일 대전고등학교 전교생 1천여 명이 시내 곳곳에서 벌인 시위와 3월 10일 대전상업고등학교 6백여 명이 시내로 진출하여 벌인 시위를 통틀어 일컫는 것으로, 대전충청권 최초의 학생운동이다. 3·8민주의거는 본래 대전고등학교와 대전상업고등학교, 대전공업고등학교, 대전여자고등학교, 보문고등학교 등 대전지역의 여러 고등학교가 함께 준비한 시위계획이었다. 하지만 짧은 준비시간과 사전 발각으로 두 학교 학생만 시위를 할 수 있었다. 대전의 3.8민주의거는 대구 2·28민주의거, 마산 3·15의거와 함께 4·19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다.

대전지역 고등학생들의 연합시위 계획

1960년 2월 28일 대구의 고교생들이 벌인 2.28대구민주화운동은 전국의 모든 고등학생들에게 큰 자극제가 되었다. 대전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3.1절 기념행사 이후 각 학교마다 보이지 않게 술렁이고 있었다. 3월 7일 대전의 여섯 개 고등학교 학생들이 모여 3월 8일에 예정된 민주당 장면 부통령후보의 공설운동장 유세강연과 때를 맞춰 대전에서도 시위를 하기로 뜻을 모았다. 대구에서도 시위를 했기 때문에 대전에서 더 큰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러나 연합시위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몇몇 고등학교의 간부와 대표 학생들이 경찰에 잡혀가거나 교사들의 저지, 짧은 시간의 준비 등으로 인해 불발되었고 대전고등학교만이 시위를 강행했다.

"3월 8일 날 아침에 등교하자마자 학도호국단 간부 각 반장들 전부 다 일단 교무실로 다 불려갔어요. 교장님 관사로 ... 교장선생님이 회유한 거죠. ... 이대로 있으면 안 되니까 담 넘어서래두 튀어야 되겠다.., 선생님들은 뭐 허둥지둥 학교에선 난리가 났죠. 그래서 대문으로는 미처 못나가고 울타리 그냥 뛰어 넘어가고 그냥 뭐 밑으로 나오고, 나오고, 넘어서 어~ 지금으로 말하면 대흥네거리, 그 당시에는 로타리였습니다. 대흥로타리. 그래서 우회전하면 공설운동장 쪽으로 나오거든요. 그쪽으로 쭉 내려갔었습니다."

3월 8일 대전고등학교 전교생 1천여 명 시위

3월 7일 오전, 대전고등학교 교장은 학생 간부들을 교장 관사로 불러 다음날 예정된 장면 민주당 부통령 후보의 강연회에 참석치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3월 8일 아침, 학생들이 등교하자마자 학도호국단 간부들은 교무실로 불려갔다. 학생들의 시위계획은 이미 탄로난 상태였다. 교장은 1, 2학년 학생대표 19명을 교장관사로 불러 감금하고 시위 철회를 설득했다. 그러나 5교시가 시작될 무렵, 학생들은 운동장에 모여 결의문을 낭독하고 전교생 1천여 명이 거리로 뛰쳐나갔다. 목적지는 장면 후보의 강연장소 공설운동장이었다. 경찰은 공설운동장에 소방호스로 물을 뿌려 시위대를 분산시킨 뒤 기마대가 말을 타고 쫓아가 곤봉과 소총으로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연행했다. 그 과정에서 수십 명이 연행되고 적지 않은 학생들이 다쳤다. 100여 명 또는 200여 명씩 소부대로 흩어졌던 학생들은 인동, 원동, 대전역, 목척교, 선화동 등의 거리를 지나 도청 앞에 집결하여 다시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로 80여 명이 연행되었고 주모자로 분류된 5명은 다음날 새벽에 풀려났다.

"장면 부통령 후보가 유세하기로 되어있는 공설 운동장으로 쭉 막~ 밀치고 갔습니다. 근데 거기서 이제 흐트러지기 시작했는데 그 당시 공설운동장 주변은 전부 다 논이었습니다... 논에 빠지고 ... 총개머리로 막 휘두르는데... 그때도 기마 경관이 말 타고 와서 총을 겨누고 발사를 했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공포탄. 그게 이제 실탄인줄 알고 '야, 이거 큰일났다.' 그 다음에 우리가 아주 생생한 것은 염산 있죠, 염산. 염산을 뿌리는걸 제가 봤습니다. 염산을 뿌리니까, 옷에 염산이 맞으니까 이게 다 뚫어지더라고."

3월 10일 대전상업고등학교 전교생 6백여 명 가두시위

대전상업고등학교는 고등학생 연합시위가 불발되자 자체로 시위를 계획했다. 대전상업고등학교는 3월 10일 시위를 하기로 하고 사전준비에 착수했다. 하지만 계획이 발각되어 일부 간부들이 연행되었고, 남은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경찰의 눈을 피해  600여 명이 시위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3월 10일 아침조회가 끝나자마자 학생들이 대열을 형성하여 교문 밖으로 나갔다. 학생들은 “학원의 자유를 달라”, “친구를 빨리 내놓으라”는 구호를 외치며 대전경찰서를 향해 시위를 시작하였고, 시민들의 박수를 받으며 시청 근처에 이르렀을 때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 진압경찰뿐만 아니라 정체불명의 단체까지 동원되어 시위대열에서 부상자가 속출하였고 학생 50여 명이 연행되었다.

"대구에서도 하니까 우리도 좀 해야겄다, 하는 몇 몇 학생들이 계속 얘기가 되어 있었어요. 대전 시내가 같이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얘기들을 많이 했습니다... 사복 경찰이라든가 학교 선생님들이 참 그 와해시키기 위해서 굉장한 많은 노력들을 했죠. 대전고등학교 같은 경우는 3월 그냥 8일에 했는데 다른 학교는 같이 동참을 못했죠. 그러다가 대전상고 같은 경우는 '안 되겄다 우리는 우리대로라도 해야겄다'라는 얘기를 몇 사람이 해가지고 3월 9일 날 간부들이 모였었어요. 모여서 이제 3월 10일 날 오전 수업 끝나고 오후에 하자라는, 시위를 하자라는 결정을 했는데... 아침에 나와 보니까 다 잡혀간 거야. 그래서 '야, 큰일 났다, 안 되겄다' 해서 그냥 아침에 갑자기 잡혀가지 않은 애들 모여가지고 '오늘 조회 끝나고 하자. 시위 하자' 그래서 조회를 끝나고서 바로 시작을 했습니다."

3.8민주의거는 2018년에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현재 3‧8시위와 3‧10시위를 주도했던 인물 중심으로 '3‧8민주의거사업회'가 결성되어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