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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열사, 박현민을 기억하다
많은 이들은 '6월항쟁'하면 그 시작점이자 도화선이 되었던 박종철 열사(박종철고문치사사건)와 이한열 열사(이한열최루탄피격사건)를 기억한다. 하지만 6월항쟁에는 학생, 종교인, 회사원 등 수많은 시민이 참여했고, 그 뜨거운 열기가 마침내 6.29선언을 이끌어 내 우리나라의 정치적 민주화를 쟁취했다.
그 참여자 중 박현민이 있다. 1986년 숭실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한 박현민은 6월항쟁 도중 3도 화상을 입었다. 이후 1989년 군입대하였으나, 1991년 12월 군에서 얻은 병으로 제대했다. 그리고 박현민은 군 복무 중인 1990년 3월 「특별한 사유없이 연달아 두학기를 등록하지 않으면 자동제적된다」는 학칙에 의해 제적되었다. 제대한 이후 1991년 미등록제적생복적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학교 당국의 비민주적인 학사행정에 맞서 투쟁하였다.
"형은 처음 자신의 과실에 의한 제적인줄 알았으나, 알고보니 학교의 비민주적 학사 행정 때문에 자신뿐 아니라 700여명이 제적되었다는 사실을 밟혀내었다. 이런 복적투쟁의 정당성을 가지도 투쟁을 벌여 나갔다. 먼저 흩어져 있는 제적학생을 모아 복적대책위를 꾸리고, 8월부터 두달간의 선전전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전개한 것을 기반으로 40여일간 진행된 옥외천막 농성이 10월말에 들어갔다. 40여종에 달하는 유인물 4만여장과 수백만장에 달하는 대자보, 큰 벽글씨 등을 거의 도맡아 해왔다."
전대협 백만 학도에게 드립니다-전대협 영웅으로, 백만의 영웅으로 부활하는 박현민 中에서
박현민군은 "본인에게 통보조차 하지 않고 제적시킬 수는 없다"며 학교측에 복적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교육부 등에 청원서를 내는 한편, 지난해 9월에는 60일간 본관앞에서 텐트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전교생 7천여명 중 4천여명의 동참서명을 받아낸 박군은 지난해 11월 마침내 교육부로 하여금 학교측에 「박군 등 16명을 복적시키라」는 권고사항을 발송케하기도 했다는 것.
그래도 학교측이 복적을 시켜주지 않자 박군은 이번학기 들어 총학생회 산하 「복적대책위」위원장으로 일하던 중 지난달 20일 과로로 쓰러져 28일 상오 3시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다 피어보지도 못한 젊은 나이에 생일 마감했다.-경향신문 1992. 04. 30.일 기사-
박현민의 영결식이 열린 4월 30일 오후 숭실대생 5백여명이 박씨의 영정을 앞세우고 학교에서 장승배기 삼거리까지 추모행진을 벌였다. 그리고 고 박현민은 전대협 출범식이 열리는 한양대 종합운동장에서 전대협 영웅상 수상했다.
2020년 4월 26일, 숭실대학교 교정에서 '고 박현민열사 28주기 추모제'를 개최했다. 코로나19 사태에도 불구하고 열사의 유가족, 동문, 숭실대학교 민주동문회, 기독동문회, 영문과 후배 등 20여 명이 참석했다. '모두 박현민이게 하소서'라는 기도시를 낭독한 후 유가족 대표로 나선 열사의 어머니 전병임 목사는 "6월항쟁하면 이한열, 박종철이만 생각하는데, 우리 현민이도 6월항쟁에 참여했어. 이제 명예졸업도 했고, 유공자도 되었는데... 우리 현민이.. 역사적 투쟁기록으로 잘 기록해줬으면 좋겠어."라고 발언하고 눈시울을 적셨다.
6월항쟁의 시작점과 도화선으로서 많은 사람들은 박종철, 이한열 열사를 꼽는다. 그러나 6월항쟁이라는 역사는 비단 두 사람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시대를 호흡하고, 고민하고, 싸웠던 한사람 한사람의 소중한 피와 눈물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다. 박현민 열사의 분투기와 그 유족들의 노력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명료하게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