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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없이 사라진 조직, 천주교정의구현 전국학생총연맹
1975. 4. 11. 김상진의 할복 자살
'천주교정의구현 전국학생총연맹' 사건은 김상진 할복 자살과 연결되어 있다.
1975년 4월 11일 서울대 농과대학 4학년 김상진이 서울대 농대생 300명과 함께 유신독재정권에 의해 구속된 학생 석방을 요구하는 성토대회 중 할복 자살을 기도해 다음 날인 4월 12일 숨을 거뒀다.
1975. 5. 13. 긴급조치 9호 선포
김상진의 할복자살 사건을 계기로 유신철폐와 박정희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민주화운동이 거세게 일어나자 유신독재정권은 1975년 5월 13일 긴급조치 9호를 발표한다.
긴급조치 9호는 유신헌법을 부정하는 행위와 그 부정하는 행위를 알리는 것조차 금지하는 긴급조치의 완결판이었다.
1975. 5. 22. 김상진 추도식 시위
서울대생 4,000여명이 김상진 추도식을 거행한 후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훗날 오둘둘사건으로 불리게된 이 시위는 긴급조치 9호가 선포 이후 9일만에 일어난 첫 시위로, 당시 300여명이 연행되어 56명이 구속되었다.
1976. 6. 3. 배후세력 지목, 검거 시작
유신독재정권은 5.22. 김상진 추도식 시위에 배후가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배후세력을 조사하기 시작하여, 천주교정의구현학생총연맹을 배후로 지목하고는 6월 3일부터 관련자들을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이른바 천주교정의구현학생총연맹
1975년 4월경부터 심지연(서울대 대학원), 박홍석(서울대 국사학 4), 이명준(중앙대 신문방송학 4), 한경남(고대 정외과 4)을 중심으로 대학간의 학생운동을 연결한 협의체 구성을 논의하여 ‘천주교정의구현 전국학생총연맹'을 서울시내 12개 대학과 지방 6개 대학을 연결하여 조직하기로 했다. 이 조직 발기를 위하여 발기문, 제1 시국 선언문, 제15차 4.19선언문 등을 제작하고, 각 대학간의 연결을 긴밀히 하여 준비를 해오던 수사당국에 발각되었다.
당시 관련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1년 전에 발생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과 마찬가지로 북한의 사주에 의해 정부전복을 기도하였다는 등 가혹한 탄압을 받을 것을 염려하여 명동성당을 거점으로 활동하면서 종교계의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대비하였다 한다.
대학연합 조직 결성을 모의한 결과는
심지연 1심 징역 자격정지 15년 2심 징역, 자격정지 10년
박홍석 1심 징역 자격정지 15년 2심 징역, 자격정지 10년
이명준 1심 징역 자격정지 15년 2심 징역, 자격정지 7년
한경남 1심 징역 자격정지 15년 2심 징역, 자격정지 8년
김용식(연대 행정 졸) 1심 징역 자격정지 10년 2심 징역, 자격정지 7년
조성우(고대 행정 4) 1심 징역 자격정지 7년 2심 기각 등
관련자 22명이 상상을 초월한 형량을 선고받았다.
주목받지 못한 사건
이 사건은 1년 전에 발생한 민청학련 사건에 비견되는 대규모 조직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무엇보다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되면서 유신에 반대하는 운동을 신문방송에서 보도하지 못하게 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당시 정권이 불과 1년 전에 민청학련사건으로 학생운동을 일망타진했다고 여겼음에도 흔들리지 않는 학생운동의 뿌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에 부담을 느껴 적극 통제에 나섰기 때문에 더더욱 알려지기 어려웠다.
이같은 이유로 '천주교정의구현 전국학생총연맹' 사건에 대한 기록이나 자료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자료도 나중에 기독교 단체에서 정리한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