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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 사건 관련자 부인과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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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크립션
유진곤의 아내(장정혜)과의 인터뷰
유 씨는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다. 그는 작은 목재회사를 운영하며, 9살짜리 남자아이가 있다.
유 씨의 부인(40세, 강인하고 화가 나 있었다):
“1월 11일 저에게 경찰서로 오라고 했습니다. 집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아이를 데리고 가야 했습니다.
그들은 저를 바로 남산 중앙정보부 본부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이 중앙정보부가 아니라 경찰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질문 후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미대사관 앞에서 왜 데모를 했지? 왜 박정희 대통령에게 가지 않고 미국에 간청하는 거지? 오글 목사가 선동한 건가? 어떻게 오글 목사 강제추방에 반대하는 데모를 할 수 있지? 그건 정부 결정이다. 어떻게 감히 반대를 하지?’ 방식은 점잖았지만 그들이 알고 싶어하는 것은 누가 자금을 지원했는지였습니다.“
“30시간 후 애를 옆에 두고 결국 싸인했습니다. 애는 계속 ‘아저씨 엄마를 집에 보내주세요.’라고 얘기했습니다. 과장이 한번 들어왔었습니다. 계속 남편이 공산주의자라는 바보같은 거짓말에 싸인하라 그래서 짜증이 나 있었는데, 들어와서 사람들을 보고 소리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저를 담당한 사람은 본부에 9살짜리 애를 데리고 왔다고 굉장히 혼났습니다. 저는 과장에게 요원들에게 소리 지르지 말라고,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한 건 나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쓴 종이를 3번인가 4번 찢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인혁당이 조작되었다고 말하는 자 근처에 가지 않겠다는 데 서명했습니다. (그녀를 화나게 했던 내용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제 남편은 나쁜 친구들에게 빠졌습니다. 저는 남편이 자신의 죄에 대해 용서를 빌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전창일 아내(임인영)와의 인터뷰
40세로 세 여자아이의 엄마이자 아내들의 리더이다. 그녀는 4일 밤낮을 의자에만 앉아 간헐적으로만 머리를 책상에 대고 자는 것이 허락되었다.
”저는 서명하라고 한 가짜 맹세가 적힌 종이 세 장을 찢었습니다. 그들은 사인하지 않으면 몇 달이고 여기 있어야 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결국 저는 집에 남아있는 세 명의 아이를 생각하고 인혁당이 조작이라고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는 데 사인했습니다.“
임인영 씨는 그것만으로도 처참함을 느꼈다. 목요일 아침 교회 가득 메운 300명의 사람들을 눈물짓게 했으며, 신에게 더 용기를 달라고 기도했다. 그녀는 2,500명의 청중 앞에서 조작에 대해 아주 솔직하게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유창한 연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저는 영업직으로 몇 년간 일했습니다. 영업직을 하면 그런 걸 배웁니다.”
10명의 아내가 중앙정보부 본부에 갔다. 이중 가장 협조적이고 길게 보았을 때 중앙정보부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사형 선고를 받은 김용원의 아내이다. 33세인 그의 아내는 가장 온화하고 의존적이고 상냥한 여성으로 그룹 다른 아내들로부터 힘을 얻는다. 그녀는 새로 생긴 이웃들 사이에 있는 걸 좋아하지만, 장래에 대해 희망적이지 않았다.
“1월쯤에 두 남자가 와서 통X일보 기자라고 했습니다. 믿을 수가 없어서 동행하길 거부했지만 결국 가게끔 만들었습니다. (저항했나요? 내가 물었다) 예. 이웃에서 내가 큰 소리로 저항하는 걸 들었지만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 사람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짐작하는듯 했습니다.”
“저는 24시간인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저도 사형 선고를 받을 수도 있고 아버지 죄 때문에 내 자식은 죽는 게 더 나을 꺼라는 말했습니다. (김용원 씨는 여자고등학교 선생님이다.) 남편은 좋은 옷이라던가 음식조차 신경쓰는 사람이 아닙니다. 만일 뭐든 죄가 있었다면 이 모든 게 오히려 견디기 쉬웠을 것입니다.”
”저는 잠시 후 정신이 나갔습니다. 제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곤 집에 있는 세 아이였습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아이도 겨우 9살이었습니다. (남자아이, 그 다음으로 6살 3살 두 여자아이가 있다) 그들이 하라는 데로 사인을 했습니다. 제가 뭐에 사인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10장의 다른 종이에 싸인을 해야 했습니다. 집에 돌아왔을 때도 여전히 정신이 나가 있었습니다. 저는 제 남편을 배신했다는 게 너무 부끄러워서 사진을 다 찢어버렸습니다. 아들이 하지 말라고 하고 뛰쳐나갔습니다. 그리고 나서 저희 어머니(80세)가 들어와 독약을 치워버렸습니다. 3일간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열흘이 지난 후에도 머리 속에 벨소리가 들리고 아직도 몸이 떨립니다. 심한 죄책감을 느낍니다. 다른 부인들에게도 말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아내들과 있을 때만 아직 조금 편안함을 느낀다. 그녀의 자매 형제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김 씨 아내의 이야기를 카톨릭 성당 기도회에서 그곳에 있던 4500명이 들었다. 임인영 씨는 목요기도회에서 그 때 이후 경찰이 그녀는 3번 방문했다고 말했다. 그들은 ‘괜찮으십니까? 어떻게 지내시나요?’ 친절하게 물었다. (그들은 그녀가 심각하게 자살을 고려하고 있을까봐 걱정을 한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 그녀를 돕고 이야기를 나누었을지 궁금해 한 것일까?)
새해 첫날, 가족 명절(2월 11일)은 그 해를 견딘 모든 사람들에게 힘들다. 김용원 씨의 아내는 내게 물었다. ”계속 살아야 할까요?“ 우리 모두는 그녀에게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의 남편의 결백을 지지하기 위해.
그러나 그녀는 이런 것을 견디며 살 것을 계획하지 않았다. 모든 다른 아내들도, 정신적인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다.
1975. 2. 18
1975년 2월 14일 이정숙 씨와의 인터뷰, 세칭 인혁당 조직원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이수병의 아내이다. 이수병에 대한 증거들은 명백히 조작되었다는 데 아내들은 일반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물론 다른 사람들 역시 유죄가 아니다). 이정숙은 온화하지만 결의에 차 있다. 그녀에게는 3명의 아이가 있다. (남자 아이 둘은 6살 5살이고 여자아이는 15개월이다).
”1975년 1월 11일, 한 남자가 집에 와서 얘기하려 다방에 가지고 했습니다. 저는 거부했습니다. 그 사람은 몇 번 더 다른 남자와 함께 찾아왔습니다. 제가 말을 듣는다면 제 남편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계속 이야기해서, 따라갔습니다. 그들이 저를 데리고 간 곳은 중앙정보부 본부였습니다.
저는 아기를 데려갈 수 밖에 없었는데, 기저귀나 음식, 마실 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30시간 동안 저를 데리고 있었고 아무것도 주지 않았습니다. 잡무원 같은 사람이 나가서 아기를 위한 크래커를 사다 주었습니다. 남자는 잡무원을 ”심문을 방해했다“며 심하게 혼냈습니다.
그들은 제가 조지 오글 목사와 어떤 관계인지 누군가 돈을 주지 않았는지 물었습니다. 저도 사형 선고를 받을 것이라고도 말했습니다. 제게 소리를 지르고 손가락으로 어깨를 찌르면서 ”당신이 남자였으면 정말 더 심하게 당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제가 남편이 공산주의자라는 서류에 서명하지 않으면 몇 달이고 여기 있어야 할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절대 사인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실이 아니니까요. 만일 남편이 문 열고 들어와서 그렇게도 이야기 한다해도 저는 그게 강요에 의한 것이라는 걸 알았을 겁니다. 사실이 아니니까 남편이 제가 그렇게 하길 원한다 해도 사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수 시간 후에 그들은 조금씩 약한 약속을 했습니다. 제가 싸인하기 거부하자 그들은 점점 화가 났고 저는 제 아기밖에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아기는 점점 붓기 시작했고 지저분해졌습니다.“
결국 그녀는 더욱 많은 면구한 사죄 가운데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거리에서 하는 시위에 더 이상 가지 않겠다는 데 사인했습니다. 대중들 앞에서 인혁당 사건이 조작되었다고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데 사인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외국인 기자를 멀리하라는 경고를 들었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이야기라는 게 북한과 김일성을 직접 돕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습니다.“
1975년 2월 14일, JP Sinnott가 녹음한 증언

2월 17일, 이 여성들과 지난주 이야기를 나눈 이후로 많은 수감자들이 석방되었다. 세칭 인혁당 멤버들은 포함되지 않았기에 왜 여성들을 그렇게 대했는 지 조금 이해가 되었다. 인혁당 사람들은 희생양으로 남아있다. 풀려난 사람들은 여전히 공산주의자들을 사주했다는 이유로 유죄이다. 따라서 정부는 완전히 체면을 잃지 않았고, 긴급조치는 아직 타당하다.
정권의 연장은 이 사건을 조작인 채 놔둘 것이다. 4명의 아내들와 함께 공식 공판기록을 읽었다. 아내들은 공판을 보았다. 아내들은 남편들이 “아니오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한 것을 들었던 대목에서 “네 제가 했습니다.”라고 공판기록에 한두 군데가 아니라 여러 군데 적힌 것을 읽었다.
억압의 힘, 긴급조치와 유신헌법이 여전히 많이 통용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이다.
생산자
James P. Sinnott
기증자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등록번호
00486056
분량
5 페이지
구분
문서
생산일자
  • 1975.03.14
  • 형태
    문서류
    설명
    인혁당 사건 관련자 부인과의 인터뷰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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