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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ct Sheet #49 "Who Will Be Next to Fill My C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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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크립션
한국 팩트 시트 #49
1978년 10월 13일

“내가 있던 감옥에 누가 들어오게 될까요?”

8월 15일, 한국이 일본의 지배에서 독립한 것을 기념하는 날인 광복절에 전통적으로 국가는 박애의 의미로 죄를 회개하는 모습을 보이고 품행이 방정하다고 기록된 수감자를 석방한다. 올해도 예외는 없다. 올해 석방자 중 22명은 정치범으로, 인권 투쟁을 하다 수감 생활을 했다. 그들 중 몇몇은 혐의를 입증할만한 뚜렷한 증거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자 스파이 활동을 조직하는데 관여한 것으로 고발당했다. 이들은 이 땅의 자유와 정의에 그 어느때 보다 헌신하고 있는 사람들이고, 수감자들의 석방은 이들이 죄를 뉘우쳤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석방은 여기에 인권에 대한 진전이 있는 것 처럼 보이기 위한 정부 계획의 일부로 여겨진다.

실제로 그런 징조는 없다. 이 수감자들이 석방되는 바로 그 순간 다른 사람들이 체포되고 있다. 8월 15일 전주에서 99명의 젊은이는 장로교 청년대회 참가와 관련된 질문을 받았다. 그중 6명은 정식 기소를 당했고 약 30명은 학교로부터 제명통지서를 쓰라는 압박을 받았다. 나머지는 장로교회와 관련된 활동을 할지 학교에 다닐지 둘 중 하나 선택을 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모순되는 일들의 역설로 한 젊은 정치범 수감자는 이런 말을 했다. “내가 감옥을 나가면, 내가 있던 감옥에 누가 들어오게 되나요?”

새로 체포된 사람들의 명단, 재판에 오른 이름들, 석방된 사람들, 그리고 이런 사건들이 야기한 고난과 공포, 고통은 당사자들 뿐 아니라 그들 가족 전체에 미친다. 때로 가족들이 심하게 수치심을 느끼게 만들기도 한다. 더 비극적이게도 정부 요원과 경찰은 가족들을 괴롭히고 친지로부터의 도움을 끊어내기도 한다. 체포를 피하기 위해 또는 조작사건으로 기소된 가족 구성원이 숨었을 경우, 다른 가족들은 종종 정보를 제공하거나 ‘고백서’에 서명을 하면 그들이 사랑하는 가족이 더 수월해질 것이라는 약속을 받는다. 그러나 만일 요원들에게 정보를 주거나 협력할 경우, 가족들은 곧 그 약속들이 공허하다는 걸 알게 되고, 혈육을 배신했다는 죄책감도 깊게 느끼게 된다.

인권 활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2년간 복역한 김윤의 어머니 김한림은 구속자 어머니와 아내들의 구속자들을 지지하는 모임을 조직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녀는 가족들이 그들이 사랑하는 가족이 조국의 정의와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해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모임은 구속자 가족 서로서로 뿐 아니라 전체 인권운동에 힘과 지지가 되고 있다.

목요일 오전, 금요일 저녁, 일요일 오후 예배 시간 갈릴리 교회는 인권과 관련된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시련과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서로 지지함으로서 신의 존재를 느낄 수 있게끔 기도회를 지속하고 있다. 이 팩트 시트에서 우리는 기도회에서 공유한 ‘유인태 어머니의 고백’에서 발췌한 내용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다.

*이 팩트 시트는 최근 캐나다 우편 파업으로 지연되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유인태 어머니의 심경 고백
저는 유인태의 엄마입니다. 아들은 1974년 4월부터 복역하고 있습니다. 인태는 긴급조치 1호와 4호를 위반한 것으로 체포되었고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는 체포되었을 때 서울대학교 학생이었습니다. 그의 사진이 “수배중 : 유인태” 라는 설명을 달고 서울 시내 게시판과 벽에 붙었습니다. 경찰과 중앙정보부는 아들을 잡기 기다리면서, 내가 돌아보는 곳마다 있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아들이 분명히 간첩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복역하는게 그를 더 큰 목숨이 달린 위협으로부터 막을 것이라 들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의 목숨을 구하고 싶으면 기관들이 아들을 찾는데 우리가 협조를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우리가 엄청나게 순진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때 저는 만일 이게 우리 아들을 구할 방법이라면, 엄마로서 그 기관들에 협조를 해야만 한다고 느꼈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그들이 우리 아들을 찾는 걸 도왔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최악은 우리가 경찰이 아들을 찾기를 바랐다는 것입니다. 아들의 재판을 목격하기 전까지 경찰과 중앙정보부에 속았다는 걸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들이 사형을 선고받았을 때 얼마나 얼마나 끔찍했는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내가 내 아들의 체포를 바랬다는 걸 떠올리면 어찌나 비참한지요.

봄,여름 내내 눈물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그저 내가 내 아들에게 저지은 죄로 죽기만을 바랐습니다. 그러나 우리 아들은 면회할 때나 법정에서 너무나 용감했습니다. 오히려 저희들을 용기와 위로로 가득하게 했습니다. 이때 약 200명 학생들이 잡혀왔고, 저는 감옥에 아들,딸이 있는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면 언제든 안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사형선고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을 때 신의 은총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1975년 2월 수백명의 학생들이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아들은 거기에 포함되지 못했습니다. 저는 아들의 석방을 울부짖었고, 관계 기관은 우리가 조용히 있으면 아들이 풀려날꺼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목요일 아침 기도회나 금요일 저녁 찬양 또 그때 하는 인권을 위한 예배에도 참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곧 아들이 석방될까 싶어 저는 그들의 말을 따랐고 기도회에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항상 다른 가족들에게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만일 인태가 석방될 약간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느끼며 살 수 있었습니다.

침묵을 지키라는 중앙정보부의 명령은 내 귓속에 녹음기 소리 같았습니다. 저는 이게 그게 자장가처럼 우리를 재우고 조용히 만들었다는 걸 압니다. 저는 민주주의가 우리 아들 같은 수감자들이 석방되지 전에 복원되어야 한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저는 자유와 정의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정부가 행동하기를 기다리는 대신 그걸 위해 싸워야만 한다는 것을 보게되었습니다. 억압과 폭력이 사라진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만일 내 아들이 석방되더라도 다른 어머니의 아들이 감옥에 갇힐 것이고 수감과 석방의 반복이 이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감옥에 있는 내 아들로부터 배운 교훈이 바로 이것입니다.

● 추신 : 수감자들이 석방될 때 사면되지 않고, 언제든 다시 수감될 수 있으며 그들의 형기를 마쳐야만 했다는 것을 언급해야 겠다. 유인태는 8월 15일 석방된 수인 그룹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다음주에 다시 수감되었고 금요일 예배에서 그와 다른 사람들을 정부가 어떻게 간첩으로 조작했는지 연설했다는 이유로 조사를 받았다. 그는 그 다음에 다시 풀려났다.
업데이트 :
전 대통령 후보 김대중이 의료 처치를 받을 것으로 여기고 감옥에서 서울 병원으로 옮긴 지 10개월이 지났다. 그 기간동안 김대중은 어두컴컴한 방에서 빛도 보지 못했고 운동을 할 기회도 거의 없었다. 그는 최근 그를 다시 감옥으로 보내하고 정부에 요구하고자 시도를 했지만 허약한 건강상태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김대중은 해로운 약을 주입당하거나 몸을 못쓰게 만드는 종류의 외과시술을 받게 될까 두려워한다. 또 사람들이 그가 지금 병원에 있기 때문에 좋은 시술을 받고 상당히 편안한 상태로 있다고 오해할까봐 염려하고 있다. 진실은 병원에 감금된 것이 감옥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 보다 그에게 더 해롭다.

10월 13, 14일에 있었던 3시간에 걸친 서울대학교 시위와 2500명 학생이 참여한 고려대학교 시위 이후 대학가는 심한 감시하에 있다.

10월 22일 직물 노동자를 위한 기도회가 열렸고 600명 이상이 참석했다. 동일방직 노동자들이 노조 선거 당시 당한 끔찍한 대우가 재현되었다. 몇 노동자는 경찰에 떠밀려 강당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예배가 다시 시작되었을 때 경찰이 강당으로 들어왔고 예배자들을 막 대하기 시작했다. 몇몇은 심하게 얻어맞았다. 경찰서에 잡혀가 조사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고문이 이어졌다. 그들은 3,4주간 잡혀있다가 풀려났다. 한 청년은 한쪽 눈을 실명했고 다른 사람들의 몸에는 커다란 멍이 생겼고 머리카락 한 뭉텅이가 빠졌다.

박형규 목사가 한국기독교장로회 청년 회의와 관련된 사람들과의 만남에 참석한 뒤 체포되었고 현재 서대문형무소에 있다. 긴급조치 9호 위반이나 반공법으로 기소되지 않을 것이라 하나 소요를 야기하고 폭동을 선동했다고 고발될 수 있다. 이 경우 최대 1년 징역이다. 그러나 사실 그는 긴급조치9호에 의해 입건되었으며 충주 youth(?) 관련은 아니고, 1978년 3월 1일 민주선언 발표에 참여한 것과 관련이 있다고 전해진다. 그의 아내는 해외의 심한 압력이 있지 않는 한 그가 석방될 희망은 없다고 느끼고 있다. 하나 기쁘게 언급할만한 점은 수감된 학생들이 목사가 그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에 굉장히 힘을 얻고 있다는 것이다.

10월 19-21일 기독교교회협의회는 정부의 반공산주의 기조와 특히 최근 기독교인의 친공산주의 활동 혐의에 대해 이념 문제 협의회를 주관했다.

전 동아일보 기자 열 명이 지난 인권 침해에 대해 자세한 연대기를 발행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6일이 지난, 10월 30일, 이 열 명을 위한 기도회가 열렸다. 기도회에서 10.17 국민선언문을 읽었다는 이유로 체포된 뒤 풀려난 금용준 목사는 감옥에 문익환 목사와 함께였다고 말했다. 그들의 감옥에는 침대, 매트나 담요도 없었고 며칠간은 음식도 없었으며 금용준 목사이 있던 주에는 난방을 하지 않았다. 문익환 목사는 아직 감옥에 있다. 금용준 목사는 심문하는 사람에게 “지금까지 나는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 전면에 서지 않았다. 그런데도 당신들은 나를 체포했다. 그러니 이제 나는 앞에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11월 2일 대구 경북대학교 학생 수백명이 정부 정책에 항의했다. 대통령이 경찰에 일러 6명의 학생이 구금되었고 4명은 퇴학을 2명은 정학을 당했다. 11월 7일 학생들은 다시 시위를 했고 이번에는 거리로 나가 300명의 진압 경찰을 물리치고 거리에서 행진했다. 이번 시위는 박정희 대통령의 고향으로 간주되는 곳에서 벌어진 첫 번째 주요 시위이다.
생산자
Monday Night Group(월요모임)
기증자
Jones, Linda Huffman
등록번호
00913648
분량
3 페이지
구분
문서
생산일자
  • 1978.10.13
  • 형태
    문서류
    설명
    - 한국의 인권상황이 나아지지 않고 있다는 서술. - 김윤의 어머니 김한림이 구속자 가족들을 조직하여 인권운동 전체에 힘이 되고 있음. 갈릴리 교회 예배 때의 기도회 소개. -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무기로 감형된 유인태의 어머니의 심경 고백 수록. - 수감되어 있는 김대중 근황, 직물 노동자를 위해 열린 기도회, 박형규 목사 체포, 11월 2일 경북대생 시위 소식 등 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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