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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ct Sheet #59 Korea Update
트랜스크립션
코리아 팩트 시트 #59
코리아 업데이트 1980년 6월 30일
붙임은 5월 말 한국 인권을 위한 북미연맹(North American Coalition for Human Rights in Korea, NACHRK)에서 준비해서 돌린 연대표와 도쿄를 통해 온 5월 28일자 광주의 메시지입니다. 서울 미대사관 전 정치자문이었던 도날드 라날드가 쓴 ‘한국에서의 미국의 부끄러운 기록’이라는 제목의 기사 복사본도 있습니다.
이 정보들은 한국으로부터 직접 받은 개인적인 전언들에서 골라 발췌한 것들입니다. 대부분은 직접 목격한 것들을 전하고 있습니다.
광주에서 있었던 5월 14,15,16일 평화시위에 이어 학생들은 변화에 대한 요구에 반응이 오길 기다리는 걸 그만두었다. 그러나 18일 오후 트럭 4대 가득 공수부대가 도착해 학생들을 향해 진군했다. 학생들은 얻어맞고 짓밟히고 잡혔다. 잡힌 학생들은 옷이 벗겨지고, 손은 머리 뒤로 해서 천으로 묶였다. 여학생도 남학생과 마찬가지로 강제로 트럭에 태워졌다. 몇몇 여학생은 완전히 벌거벗어서 한 구경꾼이 그녀의 속옷을 벗어 학생에 전해주려 했지만 심하게 얻어맞았다.
트럭에서 끌어 내려진 학생들은 줄지어 바닥에 엎드리고 앞뒤로 굴려졌는데, 벌거벗은 채 손은 머리 뒤쪽으로 단단히 묶여있었다. 부상 입은 몇몇은 학생과 시민들에 의해 병원으로 보내졌지만 공수부대가 와서 “우리도 병원이 있다”며 그들을 데려갔다.
5월 19일 전라도지사가 공수부대는 철수하라고 요청했고, 그들은 철수했다. 이즈음 시민들이 분노해 몇몇 차와 건물이 불에 탔다. 다음날 남아있던 군인과 시민들은 대규모로 쏟아져 나왔다. 한국 방송국은 허위보도를 했다는 이유로 불태워졌다. 상인들은 세무서와 시청 차고를 불태웠다.
21일은 휴일이었다. 50만 명의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다. 12시 56분 군인들이 발포하기 시작했고 도시는 피바다가 되었다. 그리고 그때가 유일하게 학생들이 인근 도시에 있던 총을 가지고 충돌 현장으로 돌아온 때였다. 그 시점까지 어떤 경찰서 보관함도 손상되지 않았다.
오후 동안 임신 7개월 여성이 남편을 찾으러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얼마 후 남편은 그의 아내가 총상을 입고 죽은 것을 발견했다.
5월 22일, 군대가 빠지고 대책위원회가 세워졌다. 도시가 청소되었고 군대와 협상을 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시청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점거했고 무기도 모였다. 부상자는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수혈 지원자를 모집했다.
미국 대사에게 청하는 것을 비롯한 모든 협상 시도가 실패했다. 5월 27일 새벽 4시 군대가 도시로 들어왔다. 우리의 목격자는 8시 30분에 시청에 갔고, 그곳에서 피바다를 보았다. 그는 건물 안에 시신을 21구까지 세었다. 새까맣게 타버린 시신도 있었다. 자살로 보이는, 건물에 있던 사람들의 대변인 중 하나였다. 우리의 목격자는 며칠 전에 그 젊은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미래에 나라의 리더가 될 법한 청년이었다. 그는 청년의 주머니에서 외국 기자의 카드를 발견했지만, 한국인 기자의 것은 없었다. 왜냐하면 한국인 기자는 광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진실에 대해 보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불탄 시체에서 총알 자국을 발견했다.
군 간부들은 광주에서 공산주의자 반란을 진압한 것을 기뻐했다.
코리아 업데이트 1980년 6월 30일
붙임은 5월 말 한국 인권을 위한 북미연맹(North American Coalition for Human Rights in Korea, NACHRK)에서 준비해서 돌린 연대표와 도쿄를 통해 온 5월 28일자 광주의 메시지입니다. 서울 미대사관 전 정치자문이었던 도날드 라날드가 쓴 ‘한국에서의 미국의 부끄러운 기록’이라는 제목의 기사 복사본도 있습니다.
이 정보들은 한국으로부터 직접 받은 개인적인 전언들에서 골라 발췌한 것들입니다. 대부분은 직접 목격한 것들을 전하고 있습니다.
광주에서 있었던 5월 14,15,16일 평화시위에 이어 학생들은 변화에 대한 요구에 반응이 오길 기다리는 걸 그만두었다. 그러나 18일 오후 트럭 4대 가득 공수부대가 도착해 학생들을 향해 진군했다. 학생들은 얻어맞고 짓밟히고 잡혔다. 잡힌 학생들은 옷이 벗겨지고, 손은 머리 뒤로 해서 천으로 묶였다. 여학생도 남학생과 마찬가지로 강제로 트럭에 태워졌다. 몇몇 여학생은 완전히 벌거벗어서 한 구경꾼이 그녀의 속옷을 벗어 학생에 전해주려 했지만 심하게 얻어맞았다.
트럭에서 끌어 내려진 학생들은 줄지어 바닥에 엎드리고 앞뒤로 굴려졌는데, 벌거벗은 채 손은 머리 뒤쪽으로 단단히 묶여있었다. 부상 입은 몇몇은 학생과 시민들에 의해 병원으로 보내졌지만 공수부대가 와서 “우리도 병원이 있다”며 그들을 데려갔다.
5월 19일 전라도지사가 공수부대는 철수하라고 요청했고, 그들은 철수했다. 이즈음 시민들이 분노해 몇몇 차와 건물이 불에 탔다. 다음날 남아있던 군인과 시민들은 대규모로 쏟아져 나왔다. 한국 방송국은 허위보도를 했다는 이유로 불태워졌다. 상인들은 세무서와 시청 차고를 불태웠다.
21일은 휴일이었다. 50만 명의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다. 12시 56분 군인들이 발포하기 시작했고 도시는 피바다가 되었다. 그리고 그때가 유일하게 학생들이 인근 도시에 있던 총을 가지고 충돌 현장으로 돌아온 때였다. 그 시점까지 어떤 경찰서 보관함도 손상되지 않았다.
오후 동안 임신 7개월 여성이 남편을 찾으러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얼마 후 남편은 그의 아내가 총상을 입고 죽은 것을 발견했다.
5월 22일, 군대가 빠지고 대책위원회가 세워졌다. 도시가 청소되었고 군대와 협상을 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시청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점거했고 무기도 모였다. 부상자는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수혈 지원자를 모집했다.
미국 대사에게 청하는 것을 비롯한 모든 협상 시도가 실패했다. 5월 27일 새벽 4시 군대가 도시로 들어왔다. 우리의 목격자는 8시 30분에 시청에 갔고, 그곳에서 피바다를 보았다. 그는 건물 안에 시신을 21구까지 세었다. 새까맣게 타버린 시신도 있었다. 자살로 보이는, 건물에 있던 사람들의 대변인 중 하나였다. 우리의 목격자는 며칠 전에 그 젊은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미래에 나라의 리더가 될 법한 청년이었다. 그는 청년의 주머니에서 외국 기자의 카드를 발견했지만, 한국인 기자의 것은 없었다. 왜냐하면 한국인 기자는 광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진실에 대해 보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불탄 시체에서 총알 자국을 발견했다.
군 간부들은 광주에서 공산주의자 반란을 진압한 것을 기뻐했다.
- 생산자
- Monday Night Group(월요모임)
- 기증자
- Jones, Linda Huffman
- 등록번호
- 00913656
- 분량
- 2 페이지
- 구분
- 문서
- 생산일자
-
- 1980.06.30
- 형태
- 문서류
- 설명
- -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전후하여 현지 목격자 증언을 Fred M. Bayliss가 날짜 순으로 편집한 내용 - 5월 14일부터 전개된 평화시위와 18일 공수부대 투입, 21일 계엄군 발포, 22일 수습대책위원회. 목격자는 광주도청에서 시체 21구를 목격. 그 중에는 며칠 전 목격자와 대화했던 젊은이의 불에 탄 시체도 있었음. 군부는 공산주의자 반란을 진압했다고 선전. - 이후 많은 사람이 체포, 살해, 실종. - 한국인들은 미국이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광주 문제에 대해 신군부에 협조했다고 믿고 있으며 이 때문에 반미감정이 널리 퍼졌다, 미 대사가 광주에서 중재에 나서지 않았다, 한편 전두환의 권력기반은 굳건해졌다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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