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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이승만 정권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여함으로써 일본 제국주의는 항복을 선언한다. 한반도는 졸지에 해방을 맞이하여 정치적 주체세력이 미흡한 상태였다.
얄타회담에서 합의한대로 미국과 소련이 38도선 이남과 이북을 분할 점령함으로써 상황은 더욱 복잡하게 전개된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정되자 찬탁과 반탁으로 전국이 격렬한 논쟁에 휩싸이며 혼란이 초래된다.
이렇게 한반도 내부가 독립문제로 시끄러워지자 미소 양국은 공동위원회를 개최하여 한반도 독립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하지만 양측의 입장차이만 노출한 채 회담은 결렬된다. 그러자 유엔은 한반도 문제를 회의에 상정하여 9개국으로 구성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파견하기로 결의한다. 그러나 소련이 이들의 진입을 거부함으로써 남북 동시선거는 불가능해지고, 유엔은 결국 남한에서만 총선거를 실시하고 단독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의한다.
이 결의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총선에서 제헌의회의원을 선출하여 헌법을 제정하고 7월 17일 헌법을 공포한 뒤,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함으로써 제1공화국이 출범한다.
이렇게 출범한 이승만 정부는 철저하게 반공주의 노선을 취하여 북측과 대립한다. 북한도 남한에 대해 적대적인 노선을 취함으로써 불안한 분단상태가 유지된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한을 불시에 공격함으로써 처절한 동족상잔의 비극이 발생하고, 3년여의 전쟁을 거친 뒤 다시 정전협정을 체결하여 군사적 대립이 계속된다.
이후 이승만 정권은 부정부패와 실정을 거듭하면서 폭압통치로 국민을 압박하며 장기집권을 획책한다. 정부 출범 직후인 48년 12월에 일제의 치안유지법을 본 뜬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국민과 반대세력에게 혹독한 탄압을 예고한다. 반공은 국시였고, 만능의 도구였다. 백색테러가 난무했다. 여운형, 송진우, 장덕수, 김구 등이 테러로 숨졌으며, 국회 프락치사건을 비롯해 조봉암 등의 정치인들이 국가보안법의 철퇴를 맞고 사라져갔다.
전쟁 기간에 임시수도 부산에서도 이승만은 정권연장을 위한 추태를 연출하는데, 52년 부산정치파동으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킨다. 54년 5월 20일 제3대 민의원 선거에서는 개헌을 통해 이승만 정권의 영구집권을 꾀하기 위해 온갖 부정을 다 동원하여 부정선거를 치른다. 야당의원을 매수하고 협박하여 사퇴시키고, 경찰과 세무서를 총동원하여 비리를 캐고, 야당 선거운동원을 불법 연행하여 투옥하고 깡패가 동원되어 행패를 일삼았다. 결국 자유당은 선거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둔다. 그리하여 국민투표제를 가미, 순수한 대통령제 실시, 대통령 궐위시 부통령이 권력 승계,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연임제한 폐지를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한다.
이 과정에서 10월 20일에는 야당 지도자인 신익희에 대해 공산주의자와의 연루설을 제기하여 흠집을 내고, 11월에 들어서는 개헌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던 신문과 잡지 13개를 폐간조치하는 폭거를 자행한다.
그리고 마침내 11월 27일 국회에서는 개헌안에 대한 투표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재적 203명 중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로 1표가 부족하여 부결되었다. 그러나 이틀 후 자유당 의원들은 의석 203석의 3분의 2는 사사오입 하면 135석이므로 개헌안은 통과되었다고 가결을 선포하는 웃지 못 할 사건이 발생한다.
이로 인해 야당은 대대적인 투쟁을 전개한다.
그리고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가 진행되었다. 대통령 후보에 출마했던 조병옥이 미국에서 급서하여 이승만의 당선이 거의 확실시되자 이번에는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또 다시 엄청난 부정선거를 자행한다. 사전투표, 무더기 투표, 대리투표가 난무하자 야당과 학생들이 선거무효를 주장하며 대대적이 시위를 벌이는 과정에서 4.19 혁명으로 발전하여 결국 이승만이 하야하고 이기붕 일가는 자살을 함으로써 제1공화국은 비참하게 막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