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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이승만은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16일 해외 독립운동 인사들 중 가장 먼저 국내에 들어와 미군정의 도움으로 독립촉성중앙회를 결성한 뒤 우익 정당인 한민당과 함께 반탁운동에 참여하면서 권력 쟁탈전에 참여한다. 그리고 국민의 여망인 통일정부 수립을 거부하면서 단정수립을 밀어붙인다.
그리고 제헌국회 구성을 위한 5.10총선거에서는 한민당과 이승만 추종세력이 대거 낙선하고 이들에 반대하는 성향이 강한 의원들이 대거 선출된다. 이들 대부분의 제헌의원들은 내각책임제를 선호했으며, 처음 헌법의 골격도 내각책임제를 선택했으나 이승만이 강력히 주장하여 대통령중심제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초대 국회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에 선출되어 48년 8월 15일에 정부수립을 선언하면서 제1공화국이 탄생한다. 이렇게 출범한 이승만 정권은 친일세력을 정치적 기반으로 하였고, 반공을 국시로 하여 출범했기 때문에 국민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48년 12월에는 일제의 치안유지법을 그대로 모방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반대세력에 대해 철권통치를 가하기 위한 법률적 기반을 마련하는 등 극우적 성향을 노출한다. 그리고 전쟁 중에 임시수도에 피난해 있으면서, 자유당을 창당하고,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켜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을 시도한다. 그리고 개헌을 위한 의결 정족수를 확보하기 위해 제3대 민의원 선거에서 대대적이 부정선거를 자행한다.
또한 54년 11월 27일에는 사사오입 개헌안 통과라는 희대의 사기극을 통해 이승만과 자유당의 영구집권을 보장하는 개헌안을 통과시킨다.
그리하여 56년 대선에서 야당의 신익희 후보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진보당의 조봉암과 대결하여 승리하여 다시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러나 계속되는 실정과 부정부패의 만연, 장기집권으로 국민들의 거부감이 팽배한 상태에서 60년 대통령 선거를 맞이하는데, 이번에는 야당의 후보인 조병옥이 또 다시 미국에서 갑자기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이승만의 당선은 기정사실화한다. 하지만 자유당 정권은 이승만이 연로하기 때문에 언제 유고상태가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대통령 궐위시 권력을 승계하게 되어 있는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실시한다.
이승만 정권은 2월 28일 대구에서 유세가 예정되어 있는 장면 부통령 후보의 유세에 청중이 몰리는 것을 막기 위해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등교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자 학생들이 이에 항의하여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른바 2.28대구학생시위사건이다.
그리고 야당 선거운동원에게 테러를 가하고, 선거에서는 대리투표와 무더기투표, 사전투표를 실시하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부정을 저지른다. 이런 상황에서 마산에서는 한 경찰관이 부정행위를 폭로하는 물증을 민주당 측에 제보하여 대대적인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학생이 다치고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연일 시위가 벌어지고 점차 과격해지자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을 투입하자 잠시 시위는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시위 도중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1학년생 김주열 군이 머리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의 시신으로 바다에 떠올라 어부에게 발견된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마산, 경남 일대에서는 다시 시위가 대대적으로 발생했고,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이어진다.
그리고 4월 18일 고대생들은 국회 앞에 몰려가 시위를 벌인 뒤 4개항의 건의문을 채택한 뒤 귀가하는 길에 종로 5가 부근에서 이정재가 보낸 정치깡패 100여 명으로부터 무차별 폭력을 당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다음날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수천 명이 모여 경무대를 향했다. 부정선거 무효와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했다. 그러자 마침내 경찰은 시민과 학생들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했고, 183명의 사망자와 수천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렇게 하여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게 되자 이기붕은 아들 이강석에 의해 일가족이 권총으로 자살을 하고, 이승만은 결국 하야성명을 발표한 뒤 미국으로 망명길에 오르면서 4.19혁명은 일단락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