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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로고

5.16군사쿠데타와 제3공화국

이승만 독재정권의 폭압에 맞서 떨쳐 일어선 시민, 학생들의 피의 대가로 민주주의를 회복하였으나 핏자국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박정희 소장이 이끄는 일단의 군인들에 의해 민주주의의 싹은 짓밟히고 만다.
4.19혁명이 성공한 지 1년 남짓 지난 1961년 5월 16일 새벽 3700여 명의 장교와 사병을 동원하여 쿠데타에 성공한 이들은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설치하여 모든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중앙정보부를 창설하여 전국 구석구석을 감시하고 회유, 협박하는 정보정치를 실시한다. 이어서 반공법을 제정하고 국가보안법을 개정하여 완벽한 통치기제를 완성한다.
이어서 혁명재판부와 혁명검찰부를 설치하여 혁명재판을 진행하는데, 여기에서 부정선거관련자, 부정축재자, 반혁명사건, 부패사건에 대한 재판을 진행하여 범죄자와 함께 반대세력 제거작업에 나선다. 제거 대상에는 과거 유력 정치인과 혁신세력이 모두 해당하며, 쿠데타 주역들 중 자신의 경쟁자가 될 만한 사람들도 포함된다. 쿠데타 주도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박정희, 장도영, 김종필, 김형욱 등 14명 가운데 혁명 직후에 반혁명사건 등에 연루되어 숙청된 사람이 절반인 7명에 달한다는 사실은 박정희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른바 4대의혹사건 등을 통해 막대한 정치자금을 조성한 뒤 은밀하게 공화당을 창당하고, 민정이양이라는 처음 약속과는 달리 박정희 자신이 전역한 뒤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여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제3공화국이 시작된다.
제5대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곧바로 경제개발에 착수한다. 국민의 반대를 무력으로 제압하면서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추진하여 청구권자금을 받아 바닥난 국가재정에 충당함과 동시에 경제개발과 정치자금으로 활용한다.
철저한 성장 위주의 경제정책으로 재벌에게 온갖 특혜를 제공한 반면 노동자 농민 등 기층민중에게는 살인적인 희생을 감내하도록 강요한다. 노동쟁의는 원천봉쇄되었으며, 노동 3권을 보장한 근로기준법은 무용지물이었다.
언론의 자유는 완전히 말살되었고, 인권은 철저히 유린당했다. 각종 공안사건을 조작하였고, 통일문제도 정권 유지를 위해 이용하였다. 북한과는 처절한 체제경쟁을 벌여 어려운 경제사정에도 불구하고 천문학적인 국방비를 지출하였다. 평화를 주장하는 것은 곧 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영구집권을 위해 야당과 국민을 우롱하며 3선개헌을 단행하고, 한국적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을 위해서라며 10월유신을 단행한다. 대통령에게 총통 수준의 권한을 부여한 유신헌법을 통해 철권통치를 대폭 강화하여 국민의 입과 귀를 막아버렸다. 그러고도 부족하여 긴급조치라는 초법적인 조치를 발동하여 나라 전체를 동토의 땅으로 만들어버린다.
더 이상 자유와 인권은 ‘한국적 민주주의’에 어울리는 용어가 아니었다.
야당도 이제는 정권을 놓고 경쟁하는 관계가 아니라 자신들의 정권에 협조하면서 자신들이 제공하는 떡고물을 얻어먹는 ‘동반자’가 되기를 강요했다. 중앙정보부가 야당의 총재를 결정하는 시대였다.
통치에 걸림돌이 되는 사람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장준하가 그랬고, 최종길 교수가 그랬고,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마저 그랬다. 현역 야당 지도자마저 외국의 수도 한 복판에서 납치하여 제거하려 했다. 말 그대로 암흑의 시대였다. 중앙정보부 지하실은 고문과 신음소리로 진동을 했다.
상전으로 모시던 미국과의 관계가 삐걱거리자 돈으로 세계 최강대국의 국회의원들을 매수하는 추태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밤이 깊으면 새벽도 가까운 법. 몰릴 데까지 몰린 민중들은 민주주의와 생존권을 요구하며 정권에 대항하기 시작했고, 이성을 잃은 박정희 정권은 야당 총재를 제명하고 국민에게 또다시 군대를 들이밀었다.
권력 내부에서 파열음이 들려오기 시작했고, 결국 자신의 왼팔격인 김재규의 총탄에 의해 18년 동안 쌓은 권력이 순식간에 무너져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