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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로고

제5공화국과 민주화운동

10.26이 일어나고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면서 서울의 봄이 찾아 왔다. 민주화에 대한 기대는 1980년 2월 29일 김대중을 비롯한 재야인사 678명에 대한 사면복권조치가 발표되면서 부터였다. 그러나 12.12로 군부와 정보기관을 장악한 전두환의 신군부는 은밀하게 집권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었다. 4월 14일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에 이어 주앙정보부장 서리까지 겸임함으로써 권력 장악의 기반을 다졌다. 5월 학생들의 시위가 가열되자 국가보위를 명분으로 5.17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국회와 정당을 해산시켰으며 3김씨를 비롯한 구정치인들을 거세하였다. 광주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정권을 찬탈한 신군부는 국보위를 통해 통치기반을 구축하였고 최규하 대통령을 밀어내고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한다. 정치정화법을 통해 민정당과 관제 야당을 창당한다. 전두환은 국보위 입법회의를 통해 임기 7년의 단임제 대통령과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제를 골자로하는 헌법안을 마련하고 정당법, 선거법을 개정하여 정권출범의 법적 장치를 마련한다, 반공법을 골자로하는 국가보안법, 제3자 개입금지 조항을 비롯해 각종 독소 조항들로 가득한 노동법,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는 언론기본법이 제정되고 언론통폐합과 언론인 해직을 감행한다.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면서 내세운 국정지표는 민주주의 토착화, 복지사회 건설, 정의 사회 구현, 교육개혁과 문화창달이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은 이런 국정지표를 실천할 정당성과 정통성이 부재하였다. 광주학살, 정경유착과 권력형 부정비리, 친인척 비리 등 도덕성을 갖추지 못함에 따라 집권기간 내내 국민적 지탄과 도전을 받아야했다. 광주항쟁의 비극과 좌절을 딛고 일어선 민주화운동세력들은 군부독재의 폭압정치에 맞서 과감하게 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