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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성주 추도회준비위원회, 법무부장관에게 진정서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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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오전, 고 김성주김성주는 19세 때 중국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였고, 1946년에는 평안청년회와 그 후신인 서북청년회 조직에 참여하여 극우반공활동을 벌였다. 1950년 11월 유엔군의 평양 진주 시 유엔군 평남 민사처의 명으로 유엔군 평안남도 지사대리로 부임하였다(「김성주 사건」, 『해방 20년사』, 1965, 680쪽). 추도회 준비위원회는 법무부장관에게 진정서를 보냈다. 추도회 준비위원회는 진정서를 통해 “공판도 열지 않고 사형을 했던 당시 군법회의 관계관들을 엄벌에 처하는 한편, 현재 그 유족들이 죽은 시체라도 도로 찾고 싶어 하니 여기에 최대의 성의를 베풀어주기 바란다”고 요구하였다.『동아일보』 1960. 5. 19 조3면. 김성주는 1953년 6월 25일 오후 2시경, 서울시내 을지로2가에서 헌병총사령부(헌총) 헌병들에 의해 불심검문을 받고 헌병사령부로 끌려갔다. 헌병총사령부로 끌려간 김성주는 원용덕 사령관의 명령으로 긴급 구속되어 제3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헌병총사령부는 김성주가 조봉암과 공모하여 국가변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허위자백을 강요하였고, 가짜증인을 등장시켜 허위조서를 만들기도 하였다. 결국 육군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김성주는 1954년 4월 16일, 강제로 원용덕 중장의 집으로 끌려가 원 중장의 운전사 임정수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 사건은 김성주의 유엔군 평남지사대리 활동 경력, 정적인 조봉암에게 조력한 김성주를 제거하려는 이승만정권, 서북청년단 동료이자 전 치안국장 문봉제의 야심 등이 요인이 되어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4월혁명 이후 김성주의 유족들이 진상조사를 요구하면서 이 사건에 대한 재조사가 시작되었다. (『동아일보』 1960. 8. 3 조3면 ; 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상)』, 역사비평사, 2000, 77-79쪽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화운동사1』, 2008, 70쪽).
분류
과거사 진상규명운동 196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