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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강력입법 찬반 문제로 분위기 험악해져

18일, 대구반공임시특별법안데모규제법 제정을 지지하는 단체와 반대하는 단체들 간에 시위와 집회장소를 둘러싸고 험악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대구경북대학·청구대학·대구대학 및 일부 고교생들로 구성된 2대악법 반대 경북학생공동투쟁위원회는 이날 달성공원에서 집회를 열기 위해 당국에 집회신청서를 냈으나 거부당하였다. 하지만 경북학생공투위는 오후 4시 30분부터 6시까지 대구역 앞 광장에서 집회를 열고 뒤이어 횃불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 시위에는 약 5천명이 모였으며 “피 흘려 찾은 권리, 피 흘려 지키자”는 구호를 외쳤다. 한편 일부 시위대는 오후 6시 30분경 대구시내에 있는 조재천 법무부장관의 집으로 달려가 약 40분 동안 “자유당 부정선거 민주당이 다시 한다”, “민주당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한편 학도의용군동지회에서는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우선 서울에서 연사 2명을 초청하고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대구역 앞 광장에서 반공법안 제정 지지찬성 집회를 열기로 하는 한편, 오전부터 시민들에게 반공법안 찬성 삐라를 돌렸다.『민족일보』 1961. 3. 19 조1면 ; 『조선일보』 1961. 3. 18 석3면 ; 『대구매일신문』 1961. 3. 20 조3면. 대구지역 경찰은 2대악법 반대 경북학생공동투쟁위원회의 활동을 분쇄하기 위하여 수일 전부터 학생공투위에 참여한 학생들의 가족을 개별 방문하여 시위 참여를 만류하였다. 한편 대구시는 2대악법 반대 경북학생공투위와 학도의용군동지회 양 쪽 모두에 달성공원 집회사용 신청을 불허하였다.(『영남일보』 1961. 3. 18 석간 ; 『민족일보』 1961. 3. 19 조1면). 오후에 조재천 장관의 집에서 나온 구호는 그 외에도 “일본과 합병하라”, “이북보다 더 못하다”, “극장을 없애라”, “자동차도 없애라”, “우리들에게 자전거 한 대씩 달라”, “우리는 죽을 각오를 한다” 등이 있었다(『대구매일신문』 1961. 3. 20 조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