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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인의 정치 참여 문제 논란

8일자『한국일보』사설은 3월 6일에 있었던 예술인들의 자유당후보 출마 환영대회에 관하여 예술인의 정치참여 문제와 방식 등 집권당을 지지하는 예술인들의 행태를 비판하였다. 이에 대하여 전국극장문화단체협의회는 자신들의 정치참여를 옹호하고 한국일보를 비난하는 글을 발표하여 논란을 점화시켰다. 예술인의 정치참여란 그런 것이 아니다 이른바 예술인은 사회에 대하여 어떠한 책임을 지는 것이냐.
예술 창조작업 그 자체로 족한 것인지 또는 좀 더 적극적인 정치참여의 길로 나서야 하는지의 여부는 아직도 양론이 병립된 채로 계속 논의의 대상으로 남아있지만 결국 예술인이 놓인 사회적 상황 여하에 따라 스스로 그 태도는 달라져야 하는 것으로 믿어진다.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일반적으로 선거전이 드높아 감에 따라 상당수의 문화예술인이 적극적인 태도로 나서고 있는데 개중에는 주권자들 앞에 직접 나서서 유세를 하는 이가 있는가하면 지상(紙上)을 통하여 명백히 그 의사를 표명하는 분도 없지 않아 일반의 주목을 끌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선진국가 예술인들의 사회참여의 자취를 더듬어보게 되지만 그들은 대개의 경우 약자의 편에 가담하며, 특히 비판적인 입장에 서서 의견을 표명하거나 행동하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정의가 반드시 약자의 편에 있는 것은 아니며 현실 상황에 대한 비판적인 언론이 굳이 정론임을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적어도 예술인마저 참여하기에 이르는 상태라면 비판을 필요로 한다고 보아야 하며 비판이 필요치 않은 경우라면 예술인의 선거에 대한 언동은 그 질에 있어서 일반의 비평의 대상이 될 줄 안다.
더욱이 우리나라 예술인을 총망라하였다는 모 예술단체가 도에 지나친 노골적인 선거운동에 발벗고 나서고 있지만 그것이 대통령·부통령선거법 제26조에 위반되고 있음은 물론 과연 그것이 예술인 전체의 의사에서 나온 행사인지 아닌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보도에 의하면 지난 6일 동 단체의 주체로 대회를 연 자리에서 한 연기자의 발언은 장내에 일대 혼란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동 대회 개최를 시사한 당국의 처사가 과연 온당한 것이었던가 하는 점도 문제려니와 의당 자발적인 행동이었어야 할 동 예술인대회가 정말 아무런 강요없이 예술인 전체의 동의로 이루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상 약탈한 듯이 보이는 우리나라 예술인들의 생활은 기실 예능계의 후진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여러모로 제약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한때 소수인에 의한 분노의 압력도 문제된 일이 있는 만큼 어떠한 이유로 전 예술인이 한결같이 그처럼 정치적인 의견을 동일하게 가지고 있는지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러한 일부 예술인의 망발이 전기한 바와 같은 추태를 자아냄으로서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동 단체가 지지한다는 정당 측에서는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일견하여 이러한 대회가 전○문제되었던 소위 ○찰선거대책기본요령을 상기케 하는 점에서도 당국은 심심한 고려가 있어야 할 것으로 믿는다.
출처 :『한국일보』1960. 3. 8 조1면 사설
(○는 판독불능 ; 편집자)
전국극장문화단체협의회의 정치 참여 발표문
〈우리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
3월 8일부 조간『한국일보』에 실려진 ‘예술인의 정치참여란 그런 것이 아니다’라는 사설은 분명히 우리 예술인들과 예술단체를 비방·모독했다.
그 사설을 분석해보면 이번 3·15선거를 앞두고 상당수의 문학예술인들이 직접 나서서 선거 유세와 또는 지상을 통해서 그 의사를 표명하는 분이 없지 않아 일반의 주목을 끌고 있다고 전제한 다음
첫째로 ‘선진국가의 사회참여의 자취를 더듬어 보게 되지만 그들은 대개의 경우 약자의 편에 가담하여 극히 비판적인 입장에 서서 의견을 표명하거나 행동하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한다’라고 했고
둘째로 ‘모 예술단체가 도에 지나친 선거운동에 발벗고 나서고 있지만 그것이 대통령·부통령선거법 제26조에 위반되고 있음은 물론 과연 그것이 예능인 전체의 의사에서 나온 행사인지 아닌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했고
셋째로 ‘이러한 일부 예능인의 망동이 전기한 바와 같은 추문을 자아냄으로써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동 단체가 지지한다는 정당 측에서는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라고 했다.
동 사설은 이상과 같이 우리의 선전 행동을 비방·모독함으로써 우리의 명예와 자존심에 큰 치명상을 입힌데 대해서도 도저히 간과할 수는 없다.
첫째, 선진국가의 사회참여는 약자 편에 가담하여 비판적인 입장에 선다고 마치 ‘사회참여’에 관해서 아는 듯이 큰 소리를 쳤지만 실은 그 ‘사회참여’가 무엇인지 모르는 무식을 그 사설에서 폭로하고 있다. 사회참여라는 어휘가 문학적 또는 문화적 의미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부터 이다. 그때의 프랑스의 작가 예술가들은 그들의 조국이 나치에 의해서 침공, 점령되었을 때 총궐기해서 이에 대항했고 그 후에 있어서도 작가 예술가는 현실에서 도피해서 상아탑 속에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격동하는 역사 위에서 과감하게 현실에 참여해서 올바른 정신세계를 지향하는 행동주의로서의 앙가쥬망 운동이 계속되어 왔다. 이것이 20세기 문학의 특징으로서 그 현실참여의 중심은 국가요, 사회요, 전우요, 동지요, 민족이요, 그들의 문화이다. 그 현실참여 앞에 강자도 약자도 있을 수 없다. 현대의 지성은 반드시 약자만을 돕지 않는다. 냉철한 의지와 비판으로서 내일의 역사를 예견해야 하지 않는가.
적어도 사설에서 앙가쥬망에 관한 무식을 폭로했다는 것은 지가(紙價)가 아깝다는 것 밖에 의미하지 않는다.
둘째, 우리 단체의 선거운동이 대통령·부통령선거법 제26조 위반이며 예술인의 전체 의사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면서 우리 단체를 선거운동단체 또는 전체회원의 의사를 무시한 처사인 듯이 간파하고 있지만 이것 역시 그 사설이 지닌 중대한 망설의 일부다.
한국일보여! 무식한 논설위원이여!
우리의 6개 단체는 정당도 아니오 선거단체도 아니다.
다만 이승만 박사와 이기붕 선생을 지지하고 있음으로 해서 결의문과 성명서를 발표했고 예술인 대회를 열지 않았던가. 우리는 이 박사와 이기붕 선생을 생각하지 않고는 내일의 한국을 바라다 볼 수 없다. 이 두 분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8·15 직후의 혼란 이상의 암흑기가 올 것이다. 우리가 이 두 분을 지지해야 하는 의지는 여기에 기인한다. 그리고 이 두 분을 지지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가 아닌가. 그 두 분을 지지하는 우리의 생각과 의지와 언어를 한국일보는 왜 막으려는가. 그리고 우리 6개 단체는 총의의 결의로서 두 분을 지지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 그러한 책임없는 발설을 해도 그것이 한국일보란 말인가.
셋째, 우리의 예술인 대회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동 단체가 지지하는 정당측에서는 아는지 모르는지 답답하기만 하다고 폭언했지만 우리들 6개 단체와 그 회원은 한국일보 사설이 의미하는 자유당과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 우리의 이 박사 이기붕 선생 지지는 어디까지나 우리의 자발적 자의적 의사로서 그 경비는 순전히 그 6개 단체에서 전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자유당과 관련시킨다는 자체는 신문의 생명인 조사의 미흡과 우리를 고의적으로 중상하기 위한 편견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일보여! 건설을 위한 언론자유와 언론자유를 위한 언론자유는 우리 조국의 흥망 어느것을 결정할 중대한 시기를 우리는 맞이하고 있지 않은가.
단기 4293년 3월 8일
전국극장문화단체협의회
(한국반공예술인단, 한국무대예술원, 한국영화제작가협회, 전국극장연합회, 대한영화배급협회, 대한국악원)
출처 :『서울신문』1960. 3. 9 석1면;『조선일보』1960. 3. 9 석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