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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시청 앞 격전과 시위대의 해산

시청 앞에서 밀려난 청년과 학생들을 비롯해 창원군청, 남성동파출소 등지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시위를 벌였던 시민들은 무학국민학교 앞길로 서서히 모였다. 이들은 넘어진 전주에 시멘트로 된 방화수용 물통과 드럼통 등을 이용해 방어벽을 만들었다. 200여 명의 여학생들은 마진선 철길에서 돌멩이를 치마에 담아 운반하였다. 인근신 포동에 사는 부녀자들은 시위 군중에게 식수를 나르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BBSBig Brothers and Sisters move- ment. 불우 청소년, 문제·비행청소년과 결연하여 이들을 선도하고자 하는 청년운동. 1904년 미국 뉴욕에서 BBS 운동이 처음 시작된 이후 전 세계 곳곳에서 펼쳐졌다.소속 빈민층 소년들은 휘발유와 현수막 천, 사이다병 등을 주워와 사제 수류탄을 만들기도 했다. 신포동에는 일본 등지에서 온 귀환동포와 품팔이 부두노동자, 구두닦이, 넝마주이, 홍등가의 여성들이 주로 거주하였는데, 이들도 시위에 적극 합류하였다.3·15의거사 편찬위원회, 297. 305-306쪽
시위대는 “이것이 공명선거인가? ”하고, 애국가를 부르기도 했다. 경찰은 이미 시위대의 동태를 파악하고 경비망을 폈다. 창원, 진해, 함안, 김해, 고성등 인근 경찰서로부터 지원병력이 속속 모여들었는데, 밤 10시가 넘어서는 도경 진압부대 150~200여 명도 도착했다. 경찰은 공격태세로 전환하여 소방차로 물을 뿌리는 한편 최루탄을 발사하고 소총도 쏘았다. 시위대는 돌, 막대기, 쇠조각, 유리병 등으로 맞섰으나 경찰의 실탄 난사에는 역부족이었다. 경찰이 무학국민학교 정문 앞에까지 다가와 총격을가 하던 중 무장경찰을 태운 지프 한 대가 시위대가 만든 방어벽을 뚫고 돌진해 왔다. 지프가 장애물에 걸려 멈칫하는 사이 시위대가 달려가 카빈총 1정을 탈취하였다. 이에 당황한 경찰은 무차별 사격을 감행했다. 남은 청년과 학생들은 무학국민학교 담벼락 뒤에 몸을 숨기고 돌을 던졌다. 경찰은 학교 담장과 도망가는 시위대를 향해서 실탄사격을 계속했다. 밤 11시 경 시위는 진압되었다.『동아일보』1960. 3. 17 조3면 ; 이강현 편, 53쪽.일부 기록은 밤 12시 30분 경으로 기록하고 있다(『마산일보』1960. 3. 17 2면).그러나 경찰은 기관총을 장착한지 프로 도망가는 시위대를 추격하여 차로 치이게 하거나 사격을 가한 후 닥치는 대로 연행했다. 여기에는 녹색 제복을 입은수 십 명의 반공청년단원들도 동원되었다. 반공청 년단원들의 손에는 곤봉과 총기가 들려있었다.『동아일보』1960. 3. 16 석3면, 1960.3. 17 조3면 ;『마산일보』1960. 3. 17 2면 ; 마산일보사, 36, 48쪽 ; 3·15의거사 편찬위원회, 297. 305-310쪽
무학국민학교 담 뒤에서 투석전을 벌이다 추산공원으로 도주한 청년과 학생들 70여 명은 화장막 고개에서 창원군청과 허윤수 집을 습격하고 오는 시위대와 마주쳤다. 이들은 새벽 1시 무렵 용마산 마루에 재집결하였다. 남은 이들은 거의가 청년·학 생·빈민층 소년들이었다. 시위대는 무학국민학교 앞에서 탈취한 카빈총을 앞세우고 고려모직회사 쪽을 향해 내려왔다. 경찰은 이들의 동향을 이미 파악하고 무술경관 10여 명을 대동하여 잠복해있었다. 새벽 2시 30분 무렵, 마지막까지 버티던 시위대 200여 명은 경찰과 맞닥뜨리면서 결국 도망가거나 체포되었다.3·15의거사 편찬위원회, 297. 308-309쪽. 일부 기록에서는 용마산에 집결한 약 200명의 시위대가 성호동 교회의 의자를 모아 불을 질러 경찰의 포위에서 벗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조화영 편, 35 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