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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대의 도심 유혈전과 허윤수 집 습격

창동 사거리는 남성동파출소의 총격으로 후퇴한 시위대와 불종거리에서 밀려오는 시민들로 가득 찼다. 남성동파출소 10여 미터 전방에는 무장경찰들이 집총자세로 대오를 지어 서 있었다. 그래도 시민들은 “나가 싸우자”고 외치며 남성동파출소로 접근해 들어갔다. 전조등을 밝게 켠 지프가 전진해오면 물러섰다가, 다시 전진하기를 수 차례 반복하던 중 지프가 속력을 내어 군중 속으로 돌진했다. 동시에 무장경찰들이 발포를 했다. 시위대는 골목으로 도망치거나 담벼락에 붙어 총을 피했다. 시민극장 부근에서는 또 한명의 사망자와 수 명의 총상자가 발생했다. 시위군중이 쫓겨간 뒤에도 가장 많이 총이 발사된 곳이 시민극장 부근이라는 증언도 있었다. 오후 9시가 훨씬 넘어서까지 총성은 계속됐다. 총성이 그치자 경찰들은 시민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증원된 병력으로 카빈총 개머리판과 군홧발로 무차별적인 폭행을 가하며 청년과 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연행하였다.마산일보사, 31쪽 ; 3·15의거사 편찬위원회, 302-303쪽
신마산 쪽에서는 자유당 마산시위원장 허윤수 집과 마산시장 박영두 집이 시위대의 습격을 받았다. 가족들이 피신한 상태였기 때문에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특히 허윤 수의 집은 기둥이 쓰러져 기와지붕이 내려앉았고 가구 등도 파괴되었으며 방과 마루에 분뇨가 끼얹어졌다. 허윤수는 1958년 5월 2일 실시되었던 제4대 민의원총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자유당 김종신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그러나 1960년 1월 6일 민주당을 탈당해 22일 자유당으로 입당하여 마산 시민들에게 변절자로 여겨지던 인물이었다. 더욱이 시청 안에서 시위 소식을 듣고 경찰 책임자에게 군의 출동을 요청하고 모두 사살하라고 발언했다하여 더 거친 습격을 받았다.
한편 북마산파출소에서 오동동파출소로 향하던 시위대는 도중에 서울신문 마산지국과 국민회 사무실을 습격하여 창문과 비품 등을 파손하였다. 또한 구(舊)마산 일대의 정전이 남선전기 주식회사의 고의적인 처사라고 생각하여 남전을 습격, 유리창을 남김없이 파괴하였다. 오동동파출소에 다다른약 200여 명의 시위대는 파출소앞 약 80미터 지점에 있는 다리에서 경찰의 사격으로 저지당하여 흩어졌다.『동아일보』1958. 5. 4 석1면, 1960. 1.7 석1면, 1960. 1. 23 석1면, 1960. 3.16 석3면, 1960. 3. 17 조3면 ; 김재희 편, 73쪽 ; 마산일보사, 32쪽 ; 안동일·홍기범 공저, 128쪽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53쪽 ; 대한변호사협회, 821쪽 ; 3·15의거사 편찬위원회, 281.297. 302-30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