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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마산파출소, 화재로 전소

남성동에서 북마산 방면으로 후퇴한 군중은 북마산파출소로 향하던 중에 도로 주변에 있는 점포와 사무실 등에 불을 끄라고 경고했다. 이에 불응하면 돌을 던져 유리 창을 부쉈다. 경찰에 얼굴이 발각될 것을 우려해 등화관제를 요구한 것이었다.
큰 도로를 따라오던 시위대와 상남천 옆 양측 좁은 도로로 오던 시위대는 북마산파 출소 옆 상남교(현 성남교)에서 합류하였다. 북마산파출소는 이들로 인해 완전히 포위되었다. 시위대는 경찰대에 의해 다리에서 행진이 제지되었다. 파출소 내로 진입하려는 시위대와 집총자세를 취한 경찰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시위대는 경찰을 향해 야유를 보냈다. 그러던 중 한 학생이 파출소로 뛰어들었고 경찰의 총격에 쓰러졌다. 이와 동시에 시위대의 투석과 경찰의 실탄사격이 이어졌다. 계속되는 실탄사격에 파출소 뒤 후면도로에서 시위를 벌이던 일부는 골목으로 도피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경찰의 사기는 한풀 꺾였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경찰 2명이 뒷담을 통해 도주했다. 시위대는 파출소에 돌을 던졌고한 무리는 파출소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 즈음 북마산 파출소에 화재가 발생했다.화재 발생의 원인으로 대한변호사협회는 정전 후에 파출소에서 석유램프를 켜 놓았던 것이 시위대의 투석에 의해 넘어지는 바람에 실내 기물에 점화되어 발생했다는 것이 가장 근거 있다고 판단했다(대한변호사협회, 820쪽). 일부 기록은 시위대가 북마산파출소를 습격할 당시 구마산 일대에 전기가 나갔고, 경찰이 불 꺼진 지서에서 호롱불을 켜고 시위대와 대결하다 후퇴할 무렵에 화재가 발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동아일보』1960. 3. 17 조3면). 또한 일부 기록은 시위대의 한 무리가 파출소 안으로 뛰어들어 난로에 비품 등을 던지다가 화재가 발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동아일보』1960. 3. 16 석3면). 반면 일부 기록은 파출소 내 한 가운데 있던 난로가 왈칵 밀려드는 시민들의 발길에 채여 넘어졌고 이 바람에 바짝 마른 목조건물의 파출소가 삽시간에 불길에 휩싸였다고 기록하고 있다(3·15 의거사 편찬위원회, 305쪽).오후 9시 30분 경이었다.조화영 편, 33쪽 ; 3·15의거사 편찬위 원회, 305쪽. 일부 기록은 오후 10시 경으로 기록하고 있다(이강현 편, 52 쪽).급히 출동한 소방대가 소화 작업을 시도했으나, 흥분한 시위대는 소방차를 향해 투석하였다. 소방차 운전수는 흥아공업사(현 문창교회) 앞에 소방차를 세워둔 채 도주했다. 뒤따라오던 소방차도 파출소를 300미터가량 남겨두고 운전수가 돌을 피해 차에서 뛰어내리는 바람에 담벼락을 들이받는 사고가 발생했다. 파출소 건물은 전소했다. 다수의 시민들은 귀가했고, 일부 청년들과 학생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져 한 무리는 신(新)마산 쪽으로, 또 한 무리는 오동동파출소를 향해 이동하였다.『한국일보』1960 3. 16 조1면 ;『동아일보』1960. 3. 16 석3면, 1960. 3. 17조3면 ; 대한변호사협회, 820쪽 ; 이강현 편, 52-53쪽 ; 조화영 편, 32-33쪽;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53쪽 ; 3·15 의거사 편찬위원회, 303-305쪽
북마산파출소 부근의 충돌로 인한 사상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사망자 : 김삼웅, 김용실, 전의규
•총상자 : 김정세, 김정희, 남우익, 유경옥, 전이태, 조현대, 하병렬, 한순국 등3·15의거사 편찬위원회, 30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