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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고등학교 학생 1천여 명이 시위 감행
바로 지금 온 겨레가 땅을 치고 통곡해야 할, 비참하고도 하늘 밑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기막힌 변을 겪은 우리는, 아직도 억울한 가슴의 상처를 부둥켜안고 엎드려만 있어야 한단 말인가.
학도들은 일어섰다. 우리가 단군의 자손인 이상 우리는 죽지 않고 살아있다. 우리에게도 눈, 코, 귀, 입이 있다. 우리더러 눈을 감으라 한다. 귀를 막고, 입을 봉하라고 한다. 공부나 하라고한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가슴 속에 한 조각 남은 애국심이 눈물을 흘린다. 우리는 상관 말라고 한다. 왜 상관이 없느냐? 내일의 조국 운명을 어깨에 멜 우리들이다. 썩힐 대로 썩힌 후에야 우리에게 물려주려느냐?
우리더러 배우라고 한다. 그러나 무엇을 배우랴. 국민을 기만하고 민주주의를 오용하고 권모술수 부리기와 정당 싸움만 일삼는 그 추태를 배우란 말인가?
국민이여, 잠을 깨라! 우리는 국가의 주인이다. 주인이 가져야 할 열쇠들을, 우리에게 고용당한 하인에게 하나하나 빼앗기고 있다. 피 흘려 돌아가신 선열들의 혼을 위로하자. 왜놈과 공산도배와 싸울 때 흘렸던 학도들의 고귀한 피다. 나라 찾은 오늘, 우리는 왜 민주경찰의 총부리 앞에서 피를 흘려야 하느냐. 구속된 학생들을 즉시 석방하라! 그들을 구속하려거든 백만 학도를 모두 구속하라. 삼천만 겨레를 모두 구속하라. 백만 시민이여, 잠을 깨라! 동포여 잠을 깨라! 선열들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2. 공명선거 다시 하자.
3. 경찰은 마산 학생 사살사건을 책임지라.
4. 평화적인 시위는 우리의 권리다.
5. 비겁한 자여, 너의 이름은 방관자니라.
시위는 세 갈래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뒷문을 부수고 제일 먼저 나간 제 1진 약 300명, 정문으로 나온 약 700명 중 부산진역 앞에서 서면으로 향한 제2진, 그길로 경남여고 쪽으로 향한 제3진이었다. 제1진은 부산진역 앞에서 동부산경찰서 경찰의 제지를 받아 초량으로 방향을 틀어 부산역 광장으로 향했다. 이들은 부산역 광장으로 가는 길에 조흥은행 부산남지점 앞에서 100여 명의 경찰과 충돌했다. 경찰은 20여 명의 학생들을 연행했다. 학생들은 부산역 행을 포기하고 오전 11시 경 학교로 돌아갔다. 제2진과 제3진 700여 명은 부산진역 광장에 도착하기 전 동아중학교 앞길에서 경찰 백차의 호위를 받으며 고급택시로 이곳을 통과하던 국회 마산사건조사단 일행과 마주쳤다. 국회조사단은 동래 숙소로부터 도청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학생들은 차를 향해 투석하는 한편 삐라를 뿌리면서 차를 제지시켰다. 황성수, 윤명운 의원 외 2명이 탄 고급택시 2대와 백차는 학생들이 던진 돌에 맞아 유리가 파손되었다.
시위대는 부산진역을 지나 동부산 경찰서를 통과하려 했다. 이 때 경찰은 곤봉을 휘두르며 학생들을 구타하고 연행하려 했다. 학생들도 이에 대항하여 경찰의 곤봉을 빼앗아 던지기도 했다. 학생들은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했다. 제2진인 약 300명의 학생들은 목적지인 서면으로 향했고, 제3진 300여 명의 학생은 경찰을 피해 경남여고 쪽으로 향했다. 경남여고생들의 호응을 구하기 위해 교문 앞에 이르렀을 때, 경남여고 교사들은 여학생들을 강당에 집합시키고 문을 잠갔다. 서면 쪽으로 향한 제2진은 문현동에 있는 부산공고와 전포동에 있는 경남공고 정문 앞에 머물러 “마산사살 사건에 경찰관이 책임을 지라”, “ 학원에 자유를 달라”, “ 짓밟힌 민주주의를 바로잡자”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 합류를 호소했다. 그러나 학교 당국의 저지로 타교생의 합세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시위대는 서면일대를 돌고 시내로 향했다. 삼일극장 앞을 지날 무렵 출동한 경찰들이 곤봉으로 시위대 진압했다. 학생들은 근처 데레사여자고등학교 교정으로 들어가 경찰과 대치하다 오전 11시 10분 경 결국 학교로 돌아갔다.
- 분류
- 시위 상황 / 부산 196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