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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대학교 학생, 교내 시위 감행

개강일인 4일 오전 10시 10분 경 전북대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감행했다.「덕진원두의 민주봉화」,『전북대학교 교보』77호, 1960. 4. 13. 『전북일보』는 오전 9시 30분 경으로 기록하고 있다(『전북일보』1960. 4. 5).
4월 13일자『전북대학교 교보』와 관련 전북대 측은 “기사내용 중 4·19, 4·20이 나오는 것과 군데군데 삭제된 부분이 있는 것으로 보아 4·4시위 이후 학보를 발행하지 못하다가 4월 13일자로 발간됐는데 실제로는 4월 20일 이후에 완전히 인쇄돼 배포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전라일보』1995. 4. 2).
전대열, 이선경, 한문수 등 정치과 3학년이 중심이 된 이들은 “학원에 자유를 달라”, “타살된 민주주의를 구출하자”, “기성세대는 자성하라”, “마산사건의 책임자를 즉시 처단하라”고 외치며 교내에서 시위를 했다.1995년 4월 3일 전북대 장명수 총장은 기자간담회를 열고 4월 혁명 당시 전국 대학생시위의 효시는 4월 4일에 감행된 전북대생 시위라고 주장했다(『전라매일』1995. 4. 4 ;『전라일보』1995. 4. 4 ;『전북도민일보』1995. 4. 4).경찰의 삼엄한 경계로 준비해온 ‘민주선언문’을 뿌리지 못했고, 교문 밖으로 시위행진을 벌이지 못했다. 시위대는 오후 2시 경 해산되었다. 경찰은 10여 명의 학생을 연행하였다가, 학교 당국이 책임지기로 하여 석방하였다.『전북일보』1960. 4. 5 ;「 덕진원두의 민주봉화」,『전북대학교 교보』77호, 1960. 4. 13 ; 조화영 편, 『사월혁명 투쟁사 : 취재기자들이 본 사월혁명의 저류』, 국제출판사, 1960, 272쪽.
시위 주동자였던 전대열은 4일 시위에 전북대생 700-800명이 참가하였다고 증언했다. 전대열의 증언에 따르면 “우리는 지금 자유당 백색독재에 억눌려온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우리는 이 독재정권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녹두장군 전봉준 선생의 혁명정신을 본받읍시다, 대통령선거 다시하고 독재정권 물러가라”는 내용의 선언문을 낭독한 후 학생들은 “민주주의 만세”를 외치며 스크럼을 짜고 교문으로 진출했다. 그러나 교문은 이미 경찰로 인해 봉쇄되었고 이에 학생들은 투석으로 맞서며 교문 돌파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고 한다(『전북도민일보』, 1995. 4. 19 ;『전북일보』1995. 4.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