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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의 설득으로 시위대는 학교로

오후 5시 반 경, 계속 농성 중인 고려대 학생들 앞에 유진오 총장이 다시 등단하자 학생들은 박수로 환영했다. 유 총장은 마이크로 “종로경찰서에 연행된 58명과 동대문경찰서에 연행된 16명이 지금 막 석방됨으로써 오늘 시위의 희생자는 하나도 없다”고 말하자 또다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계속하여 유 총장은 “해도 기울어지고 있으니 이 이상 농성하는 것은 현명치 못하다”고 하였다. 그는 이성을 상실치 않은 학생들의 시위를 치하하며, 빨리 집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고 간단히 말한 후 단에서 내려왔다.『조선일보』1960. 4. 19 조3면
계속하여 고려대 출신인 민주당 이철승 의원이 올라와 “나는 이철승이다. 가슴 아프고 눈물 난다”고 첫마디하자 또 박수가 터져 나왔다.『동아일보』1960. 4. 19 석3면그는 이어 “고대학생의 흥분은 개인적 흥분이 아니고 민주주의와 역사를 위한 흥분이다. 하지만 독재자나 주권 침해자와 인류는 5천년 동안에 걸쳐 투쟁을 계속하여 왔고, 또한 내일도 그 투쟁을 계속하여야 되기 때문에 학생들은 유 총장의 말을 따라야 한다. 고(故) 인촌선생도 인생의역사는 구원(久遠)하다는 말씀으로써 학생들이 도에 넘는 행동을 삼가도록 교훈하신것을 고대학생들은 상기해야 된다”고 충고하였다.『동아일보』1960. 4. 19 석1면그리고는 옆에 서있던 고려대 응원단장을 가리키면서 “이 사람을 리더로 하여 유 총장 말을 들어 학교까지 질서 정연히 간 후 해산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였다.안동일·홍기범 공저, 215-216쪽 ;『동아일보』1960. 4. 19 석1면이에 학생대표는 유충렬 시경국장과 협상하여 “경찰이 제공하는 차량은 일절 이용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학교로 돌아가겠다”고 약속하였다.조화영 편, 79쪽오후 6시 40분 경, 드디어 시위대는 4시간 40분간의 농성을 끝마치고 박수와 환호 속에 애국가와 교가를 부른 다음 “대한민국 만세”와 “고대 만세”를 부르고는 스크럼을 짜고 학교를 향해 행진하기 시작하였다.『조선일보』1960. 4. 19 조3면
그러나 43명의 학생들만은 오후 8시 10분 경까지 앉은 자세로 스크럼을 짜고 철야 농성에 들어갈 기세를 보였다. 그러나 150명 정도의 경찰관들이 이들을 강제로 해산시키고, 승용차에 분승하여 귀가조치 하였다. 그들은 해산되기 전에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채택하였다.안동일·홍기범 공저, 215-216쪽 ;『동아일보』1960. 4. 19 석1면.
서울신문은 “경찰관에게 얻어맞았다는 30명의 학생들은 끝내 학교로 돌아가기를 거부코 의사당 앞에서 계속 농성 하려고 하는 것을 7시 반쯤 지나 경찰관들이 강제로 한 사람씩 택시를 잡아 태워 보냈다. 이들을 보내는데 있어 경찰관들은 실력행사를 하였으며, 이에 대항하는 학생과 경찰관 간에는 치고받는 난투극까지 벌어졌었다”고 보도하였다(『서울신문』1960. 4. 19 조3면).
결의문 一. 국민의 권리와 자유가 짓밟힌 오늘은 하늘과 땅이 분노하고 있으며 불법 공갈 협박 사기의 3·15선거의 울분한 마산시민의 애처로운 그 참극상을 주권국민인 우리는 보고만 있을 수 없다.

一. 궐기하라 애국동표여, 36년을 두고 피를 흘려 전취한 우리 민주주의가 지금 몽둥이와 총검 앞에서 피 흘리며 애소하는 저 구슬픈 소리를 우리는 듣고 있지 않는가. 민족을 위한다는 위정자들이여, 그대들의 이름은 부귀요 영화이며 몰인정한 위선자라고 우리 국민은 모두가 분노하고 있다.

一. 집권당 위정자여, 그대들이 떼어버렸던 양심을 다시 찾지 않으려는가. 지금 거국적인 민중궐기의 피 끓는 이 호소를 듣고 어서 그 양심을 다시 찾아 민권수호에 목숨 바친 지하에 계신 선열과 시달리고 통곡하는 우리 국민 앞에 늦진 않아서 왔으니 사과하라.

一. 우리는 지금도 용서하여 줄 용의가 있다. 같은 핏줄기에 단군의 자손이기에 동표여 어서일어나 집권당의 사과를 들어보자.
출처 : 안동일·홍기범 공저, 『기적과 환상』, 영신문화사, 1960, 216-217쪽 ;『동아일보』1960. 4. 19 석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