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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고등학교 학생들, 삐라 뿌리며 시위

경찰의 포위로 4월 15일 시위계획이 좌절된 동래고등학교 학생들은 16일부터 5명의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700매 정도의 삐라와 플래카드를 만드는 등 다시 계획을 세웠다. 18일오전 9시 50분 경,옥일성(부산 국제신보사 기자), 「취재기자가 본 그 밑바닥 : 나는 부산의 민중의거를 증언한다」, 조화영 편, 218쪽.동아일보는 동래고교의 시위 시작 시각을 오전 9시로 보도하였다(『동아일보』1960. 4. 19 조3면).동래고 학생 100여 명은 경찰의 눈을 피해 각자 시내로 뛰어나온 후 대열을 정비하였다. 이들은 “경찰은 학원에 간섭 말라”, “경찰은 김주열군과 김영길군의 참사를 책임지라”, “평화적인 데모는 우리들의 자유다”, “피로 찾은 민주주의를 정의로써 사수하자”, “구속된 학생을 즉시 석방하라”는 등등의 구호를 외치며 삐라를 뿌리면서 약 1킬로미터 지점인 온천동까지 시위를 감행하였다. 그러나 이때 달려온 90명의 무장경찰관에게 온천동 입구에서 플래카드를 빼앗기고 트럭에 실려 강제로 학교로 돌아갔다.동래고등학교 학생회, 「분노에 찬 젊은사자들」, 이강현 편, 81-88쪽 ; 『동아일보』1960. 4. 19 조3면 동래고등학교 선서문 우리는 오늘 이 데모를 감행함에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평화적으로 원만히 진행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아울러 우리는 이것이 어느 외부의 조종이나 권고로 인해서 일어난 것이 결코 아니며, 어디까지나 우리들의 자발적인 행동에서 기인된 것임을 명백히 한다.
지난 4월 15일, 경찰은 우리 학교 주변에 수 백 명이나 동원해서, 될 수 있으면 잡념을 버리고 자신들의 본분에만 충실하려는 우리들에게 정치적인 충동을 일으키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포감을 조장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지난 선거 때에도 경찰은 학교에 출입하기를 자기 집처럼 드나들었다. 그리고 형사들은 아무 생각 없는 학생회 간부학생들을 찾아다니며 진술조서니 조사서니 하는 것들을 쓰게 하고, 정부와 경찰에 대한 증오감을 격화시켰다.
그러나 우리는 참아왔다. 데모는 불법이라는 학교 당국의 의견에 좇아서였다. 그런데도 경찰은 우리들에게 계속해서 이런 데모를 감행하지 않으면 안 되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산시민과 학생이 다 같은 백의민족인 경찰에 의하여 무자비하게 인권이 유린되었음은 우리들 학생으로서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경찰의 이 무자비한 행동에 대하여 엄중한 책임을 묻는다. 우리는 이승만 박사의 항일투쟁사에 빛나는 그 숭고한 투쟁정신을 이어 받아 정의를 위하여서라면 경찰의 어떠한 압력이 있더라도 우리들의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끝까지 투쟁할 것을 선서한다.
단기 4293년(1960년) 4월 18일
동래고등학교 학생 일동
출처 : 동래고등학교 학생회, 「분노에 찬 젊은 사자들」, 이강현 편, 『민주혁명의 발자취 : 전국각급학교 학생대표의수기』, 정음사, 1960, 80-81쪽 ;『사월혁명 자료집 : 4·19의 민중사』, 학민사, 1984, 71쪽
결의문 동래고 학도는 이렇게 외친다. 조국 광복을 위하여 목숨을 내건 선열과 현존 이 대통령의 생생한 투쟁사를 읽고 또한 영화를 보고 감격하고 있다.

전국의 학도여, 눈을 떠라.
그대들 가슴 속에 진정한 선열의 피가 흐를진대 눈에 총알이 박혀 참살당한 내 형제의 시체가 대낮에 표류하는 마산을 상상하라. 평화적인 시위는 우리의 자유다. 마산사건에서 총구 앞에 민주주의를 목이 메이게끔 외치다가 쓰러진 행방불명된 내 동족들의 살상에 책임지라. 이비참한 참극을 보고 의협심에 불타는 배달의 자손은 참을 수가 없다.
출처 :『동아일보』1960. 4. 19 조3면
구호 1. 경찰은 신성한 학원에 간섭 말라.
2. 김주열군과 김영길군(제2차 마산사건 때의 피살자)을 참살한 자를 속히 처단하라.
3. 마산사건 이후 행방불명자의 행방을 조속한 시일 내에 밝혀라.
4. 평화적인 시위는 우리들의 자유다.
출처 : 옥일성(부산 국제신보사 기자), 「취재기자가 본 그 밑바닥 : 나는 부산의 민중의거를 증언한다」, 조화영 편, 『사월혁명투쟁사 : 취재기자들이 본 사월혁명의 저류』, 국제출판사, 1960, 218쪽
교내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학생 1,200여 명이 뒤를 이어 교문을 나와 동일한 구호를 외치고 삐라를 뿌리면서 시위에 들어갔다. 시위를 제지하기 위해 정·사복경찰관들이 요소요소에 배치되었지만 시위에 합류하는 학생들은 계속 증가하여, 1,300여 명이 온천동 방면과 부산 시내 쪽으로 3개 대열을 지어 시위를 감행하였다.동래고등학교 학생회, 89-90쪽 ; 『동아일보』 1960. 4. 19 조3면주력인 1천여 명은 부산 시내로 향하고, 약 300명은 온천장 쪽으로 향하였다. 시내로 향하던 주력부대는 오전 10시가 조금 지나 동래경찰서 앞에서 강력한 제지를 받았으나 그곳에 대기하던 소방차를 부수고 소방관 2명에게 중상을 입히며 밀어붙였다. 그러나 제2방어선인 거제리 철도관사 앞 경찰의 제지는 더욱 완강하였다. 학생들이 돌을 던지며 이를 돌파하자 경찰은 최루탄과 위협사격으로 공포를 발사하였다. 학생들은 이를 무릅쓰고 제3방어선인 양정동 목재소 앞도 돌파하였다.
오전 10시 40분 경, 시위대가 전포동 적십자병원 앞에 이르렀을 때 경남공업고등학교, 부산공업고등학교, 항도고등학교 학생들도 합류하였다. 이들은 경찰의 방어선을 피해 철길을 따라 방향을 서쪽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경찰의 제지로 흩어져 제5방어선인 범일동 삼일극장 앞에서 이르렀을 때는 약 200명만이 남았다. 이곳에서 다시 충돌이 벌어져 경찰은 최루탄을 터뜨리고, 소방차는 붉은 물을 뿌리기 시작하였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학부형들은 “마산사건을 상기하여 보라”며 울상이 되어 있었다.
한층 더 완강해진 경찰의 제지에 학생들은 주저앉아 농성에 들어갔다. 이에 경찰은 학생들에게 협상을 제의하고, 연행된 학생들을 전원 석방하기로 약속하였다. 비로소 학생들은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면서 질서정연하게 학교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경찰은 이들이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호위하였다.
한편, 온천장 쪽으로 향한 시위대는 온천장 입구에서 경찰의 제지를 받고 되돌아갔는데, 150여 명의 학생들은 원예고등학교 앞을 거치면서 다시 시위대를 재편성하였다. 이들은 명륜동에서 다시 경찰과 충돌하였다. 학생들은 경찰의 몽둥이를 피해 물이고인 논으로 뛰어들어 산기슭으로 도망쳤다.옥일성(부산 국제신보사 기자), 219-220쪽 ; 『동아일보』1960. 4. 19 조3면
오후 2시 30분 경, 시위에 참여했던 학생들이 동래고 교정에 집합했다. 학생위원장이 “선생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데모를 감행한 것에 대해서 선생님들께는 사과를 드립니다”하는 연설을 하였다. 학생들은 대대장의 만세삼창으로 5시간 30분에 걸친 시위의 막을 내렸다.동래고등학교 학생회, 94쪽부산진서에서는 동래고 학생 20여 명을 주모자로 연행 하려 하였으나 다시 시위를 하지 않겠다는 확약을 받고 곧 집에 돌려보냈다. 치안국에서는 부산 동래고 학생들의 투석에 의해 경찰관 2명, 소방서원 2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발표하였다.『서울신문』1960. 4. 18 석3면
한편 대청동 소재 덕원중학교 학생들도 시위를 감행하려 하였으나 경찰의 사전제지로 좌절되었다.『서울신문』1960. 4. 18 석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