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무대 앞 바리케이드 뚫자 무장경관 발포, 사상자만 수 십 명
오후 1시 30분 경, 경무대 근처 민가의 담을 넘어서 잠입한 시위대원들도 있었다. 이들은 산발적으로 경무대 입구까지 육박하였는데, 이들 중 몇 사람은 경무대 입구 경찰초소까지 도달했다. 시위대도 경무대 정문이 보이는 경복궁 뒷문에 이르렀다. 그때, 경무대 입구를 사수하던 경비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일제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이를 시작으로 경찰들의 무차별 난사가 시작되었다.
“1시쯤 되자 갑자기 팽팽팽 하고 공포탄이 아니라실탄을 쏘는 소리가 들려왔다. … 내가 깜짝 놀라 “이건 실포 소리인데 진짜로 발포를 하나?”하고 말하자 홍진기 내무장관이 나를 쳐다보았다. “아니 실포가 뭐요?”“진짜 탄환 말이요, 공포가 아닌 진짜 탄환!” 이 말을 듣고 그도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김정렬, 『김정렬 회고록』, 을유문화사,1993, 234-235·238쪽).
동성고등학교의 기록에는 “공포이거니 안심했더니 앞뒤에서 구슬픈 비명이 터졌다. 무차별 사격! 1시 40분이었다”고하였다(『동성춘추』1960. 5. 15 1면). 또 다른 기록은 “1시 25분 시위대는 4대의 소방차를 빼앗아 경무대 정문을 돌파하려고 나아갔다. 그러나 정문 앞 30~40미터 쯤 다가섰을 때 경비경찰은 무자비한 야만적인 행위의 발사를 감행하였다”고 하였다(조화영 편, 93쪽).
동국대학생 노희두도 이때 경무대 앞에서 총상을 입고 사망하였다(『동대시보』1960. 4. 30 1면).
이 시위로 희생당한 서울대생은 사망 7명, 총상 7명이었다(대학신문』1960. 5. 2 1면). 이중에는 서울대 미대 재학 중이던 여학생 고순자도 포함되어 있다. 서울대생들은 오후 5시 반 경 학교로 돌아와 해산하였다(『대학신문』1960. 5. 2 2·3면).
일부 기록에는 김치호가 숨을 거둔 시각을 20일 새벽 6시로 기록하고 있다(조화영 편, 115쪽). 그러나 조선일보는 19일 밤 10시 경 사망하였다고 한다(『조선일보』1960. 4. 24 석3면).
이날 계엄이 선포되기도 전에 군중에게 총을 쏘도록 명령을 내린 사람이 누구인가는 아직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4월혁명의 성공 이후 홍진기(당시 내무부장관), 곽영주(당시 대통령 경호관), 조인구(당시치안국장), 유충렬(당시 서울시 시경국장), 백남규(당시 서울시경 경비과장), 이상국(당시 치안국 특정과장) 등은 발포명령 관계자로 재판에 송부되었다. 검찰은 이들에게 발포혐의를 추궁하고, 홍진기, 유충렬, 곽영주에 대해서는 사형에 처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학민사 편집실 편, 학민사, 194-244쪽). 그러나 1961년 10월 8일에 열린 ‘4·19 발포명령사건 등 6대사건 언도공판’에서는 유충렬에 사형, 서울시경 경비과장이었던 백남규에는 무기징역을 언도하고, 홍진기, 조인구, 곽영주 등에게는 무죄를 언도하였다.
일부 기록에는 “이날 계엄령이 선포되기도 전에 군중에게 총을 쏜 것은 내무장관 홍진기와 서울특별시 경찰국장 유충렬 및 곽영주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유충렬은 중앙청 앞에 있는 경찰 기동대에 대하여 전 화력으로 의거군중을 총격하라고 직접 지시하였고, 곽영주는 경무대 앞에 집결한 경관에 대하여 발사명령을 내렸다”고 하였다(사월혁명청사편찬회, 『사월혁명청사』, 1960, 483-484쪽).
또 다른 기록에서는 다양한 증언을 참고로 하여 최고 최초의 발포명령자는 홍진기, 경무대 앞에서 오후 12시 20분 경 쏘라는 지시를 내린 사람은 곽영주로 결론내리고 있다(안동일·홍기범 공저, 132-140쪽).
총알세례를 받은 시위대는 뒤로 물러섰다. 시종 동성고 시위대를 따라다닌 동성고 교사들은 유탄이 머리 위를 스치는 동안에는 “엎드렷!”하고 호령을 질렀고, 총성이 멎으면 “일어섯!”“후퇴!”하고 명령을 내렸다.
연세대생들은 18일 밤을 새워 선서문과 삐라를 인쇄하고, 19일 당일에는 금남의 집인 여학생회관 논지당에 숨어서 시위를 위한 최종작전을 짰다. 12시에 시작되는 채플시간에 밤새 프린트한 삐라를 뿌리고, 플래카드를 펼쳐들고서 시위를 시작하였다. 이기붕의 차남 이강욱을 비롯하여 손도심, 장경근, 한희석의 자제 등 여야정객의 자제가 많았던 연세대는 이들의 입장도 고려하며 시위준비를 하였다.
300여 명의 여학생을 포함한 연세대 시위대는 이화여대 입구에서 이대생들의 참가를 호소하여 수 십 명의 이대생들이 합세하였다. 이들은 서대문에 이기붕의 집앞에 시위대가 몰려있자 서울역 쪽으로 방향을 돌려 염천교에서 남대문을 거쳐 시경 앞, 을지로 입구를 지나 시청 앞 광장에서 약 20분간 연좌시위를 하였다.이들은 다시 종로4가를 통과하여 원남동 쪽으로 향하였다. 원남동 로터리에 도착할 무렵 사이렌 소리가 들리며 “경무대 입구에서 경찰의 실탄 사격으로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이에 경로를 놓고 고민하던 학생들은 약 20분간 지체하다가 안국동 쪽으로 향하였다. 안국동 로터리 종로경찰서 앞에는 경찰들이 바리케이드를 쌓고 총을 겨누고 있었다. 시위대 선두는 “우리는 안국동 로터리를 지나 종로로 나갈 것이며, 중앙청 경무대로는 가지 않을 것”이라고 하고 전진하였다. 그러나 오후 3시 경, 연세대 시위대는 한국일보사 앞으로 하여 중앙청에 육박하여 해무청이 바라다 보이는 곳까지 다다랐다. 주변은 벌써 큰 시가전을 치른 전쟁터 마냥 어수선했다. 시위대가 중앙청 앞을 돌아 광화문으로 방향을 돌릴 무렵 경기도청 맞은편 아파트에서 갑자기 수 십 발의 총성이 들리면서 몇몇 사람이 쓰러졌다. 시위대 선두는 20-30미터 후퇴하여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부상당한 학생과 졸도한 학생이 속출하자 시위대원들은 일어나 안국동·종로·남대문·서소문을 지나 질서정연하게 신촌으로 돌아왔다. 특히 여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시위대의 후미를 끝까지 지켰다.
오후 5시 15분 경, 3천여 명의 시위대가 학교로 돌아오자 백낙준 총장은 눈물을 흘리며 “어른들이 망쳐놓은 것을 젊은 학생들이 시정하려 싸우는데 우리는 여기에 편안히 서 있음을 죄송스럽게 여긴다”고 격려하였고, 최현배 부총장도 “자유는 값진 것”이라며 이들을 찬양하였다(『연세춘추』, 4293(1960). 4. 27 1면 ; 조화영 편, 87-88쪽 ; 홍영유, 287-290쪽).
백낙준 연세대학교 총장의 격려사
연세의 아들 딸들아!
너희들이 나아가서 행동으로 내 말을 다 하였거늘 내가 이제 무슨 말을 더 하랴!
너희들이 올바른 소신을 가졌고, 그 소신을 발표할 용기를 가진 것을 나는 자랑스럽게 여긴다.
3·1운동 때의 여러분의 선배인 김원백군의 혼이 살아나서 다시 돌아온 줄로 안다.
금일 오인의 차거(此擧)는 정의 인도, 생존, 존엄을 위하는 민족적 요구이니, 오직 자유적 정신을 발휘한 것이요, 결코 배타적 정신으로 일주하지 말라고 한 3·1정신을 그대로 표현한 줄로 알고 있다.
너희들이 연세의 전통을 다시 세웠으니 후배에게 영원히 교훈이 될 줄로 믿는다.
출처 :『연세춘추』1960. 4. 27 1면
우리와 자손의 건전한 번영과 행복을 위하여 우리는 선두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며, 보다 나은 앞날의 발전을 위하여 헌법 전문에 기록된바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진정한 민주주의 대한민국을 건설해야 하는 것이다.
몽매한 무지와 편협, 그리고 집권과 데모의 제지, 학생 살해, 재집권을 위한 독단적인 개헌과 부정선거 등은 이 나라를 말살하는 행위인 것이며, 악의 오염을 더욱 증가시키는 것 이외에 는 그 무엇이 되겠는가? 나라를 바로 잡고자 혈관에 맥동치는 정의의 양식, 불사조의 진리를 견지하려는 하염없는 마음에서 우리는 다음의 몇 사항을 엄숙히 결의하는 바이다.
1. 부정 공개투표의 창안집단을 법으로 처벌하라.
2. 권력에 아부하는 간신배를 축출하라.
3.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표시를 허용하라.
4. 경찰은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침해하지 말라.
5. 정부는 마산사건의 전 책임을 지라.
구호(우리의 주장)
一. 민주주의 반역자를 극형에 처하라.
一. 경찰은 학원 내의 일을 간섭 말라.
一. 국민의사에 반하여 개헌의 주모자를 저지하라.
一. 사상 최악의 3·15선거를 다시 하라.
一. 위정자 양심은 있는가.
一. 진리, 자유
一. 학원의 자유를 달라.
一. 3·15부정선거를 규탄한다.
一. 경찰국가 원치 않는다.
一. 학도는 살아있다.
연세대학생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