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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무대 앞에서 경찰과 마지막 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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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 15분 경, 중앙청 서문 옆에 포진한 학생들은 근처의 공사장에 있던 상수도용철관을 굴리며 전우가를 부르면서 계속 돌진하였다. 노도처럼 밀려드는 학생들을 저지하려고 경찰들은 창성동 국민대학 앞길을 가로질러 바리케이드를 쌓고 전투적인 발사태세를 갖추었다.당시 국민대는 초급대학이었는데, 중앙청에서 경무대로 가는 길 중간, 진명여고 못미처에 위치해 있었다. 그 사이 중앙청 안으로 뛰어들었던 청소년들은 경복궁 담 안에서 경무대 입구로 향하고 있었다. 시위대는 국민대 앞 경찰 바리케이드 후면을 돌파, 멈춰선 전차(電車)를 밀면서 두번째 바리케이드도 뚫었다.동국대학교 학생자치위원회, 141-142쪽. 같은 책 745쪽에서는 “학생들이 전차 2대를 밀고 효자동 종점 앞으로 육박했다”고 한다. 2만여 명의 학생들이 경무대 쪽으로 밀려들자 경찰은 실탄발사를 계속하면서 후퇴하여 최후의 바리케이드인 경무대 입구 효자동 전차 종점에 집결하였다.조화영 편, 93쪽 ; 현역일선기자동인편, 87쪽.
조선일보는 이때를 오후 1시 경으로 보도하였다(『조선일보』1960. 4. 19 석1면).

이미 동료들의 피를 본 학생들은 “살인귀를 잡아 죽여라!”, “자유와 민주주의는 우리의 것이다!”라고 외치며 한 걸음 한 걸음 경찰의 마지막 거점을 향해 계속 육박하였다. 전투복으로 완전무장한 약 3개 소대의 경찰사격 병력은 연막탄과 최루탄을 연속으로 발사하여 거리는 처절한 전장으로 화하였다. 최루탄 발사로 눈물을 흘리면서도 시위대는 물러서지 않았다. 시위대는 계속 전진하여 마지막 거점까지 불과 50미터만을 남겨놓았다.현역일선기자동인 편, 87쪽 선두에 있던 동국대 학생들은 효자동 종점에 펴놓은 세번째 바리케이드에 ‘동국대학교’라고 쓴 붉은색 플래카드를 걸쳐놓고 사기를 올렸다.『동대시보』1960. 4. 30 1면 ; 조화영편, 93쪽 학생들은이 자리에서 30분 이상 경찰과 대치하였다. 동국대 후미에 있던 서울대 학생들은 마침 학생들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나온 총장과 교수들이 있는 자리에서 서울대학교의 이름으로 제기할 요구조건을 급히 꾸몄다.서울대학교 의과학생 자치위원회, 160쪽.
일부 기록에서는 이를 “4월 19일 오후 진명여고강당인 삼일당 앞에서 대학연합시위대가 채택한결의문”이라고 하였다(『4·19의 민중사』, 학민사1984, 75-76쪽).
당시 서울대에서 발행한 대학신문에는 “학생들이 경무대로 향하는 동안 서울대의 윤일선 총장과 이양하 문리대 학장, 신태환 법대 학장을 비롯한 각대학 학장들과 교수들이 달려와 근심어린 표정으로 시위 모습을 지켜보았다. 윤 총장은 직접 시경국장과 협의하여 동대문서로 연행된 학생들의 석방을 조건으로 시위를 중지시키려고 하였으나 이미 노도처럼 밀려드는 학생들에게 이를 전달할 방도가 없었다고 한다”(『대학신문』1960. 5. 2 3면)고 하여 서울대 총장이 시위대가 몰려있는 경무대앞까지 왔다는 기록은 있으나, 이때 결의문을 채택한 내용은 찾지 못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위대가 진명여고 앞에서 채택한 결의문 1. 최루탄, 공포, 붉은 물로써 정의의 분노를 막으려 들지 말라
2. 3·15부정선거는 다시 하라
3. 마산학생 사건에서의 발포 및 고문경관을 즉시 색출 처단하라
4. 고려대 데모 습격 깡패를 검거하라
5. 이상의 요구에 대통령, 국회의장, 혹은 홍 내무가 현장에서 답하라
출처 : 서울대학교 의과학생 자치위원회, 「백색 까운들의 수기」, 이강현 편,『민주혁명의 발자취 : 전국각급학교 학생대표의 수기』, 정음사, 1960, 1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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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 상황 / 서울 196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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