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무대로 향한 시위대, 중앙청 후문에서 경찰과 격돌
중앙청 앞에서 시위대와 경찰의 첨예한 대치가 계속되던 중,일부 기록에는 시위대가 연좌농성한 시간이 약 1시간으로(조화영 편, 9쪽), 또 다른 기록에는 약 30분으로 되어있다(『조선일보』1960. 4. 19 석3면). 갑자기 통의동파출소에서 경위 한 명이 튀어나와 서성이는 시위학생들을 향해 권총을 발사하였다. 흉탄에 맞은 한 학생이 피를 쏟으며 땅에 쓰러졌다. 시위대는 이때부터 바리케이드를 뚫으려고 경찰과 악착스레 몸싸움을 하며 돌팔매질을 하였다.조화영 편, 92쪽
시위대의 선두가 경무대로 가는 바리케이드를 뚫기 위해 경찰과 충돌하던 오후 12시 10분 경, 지프차에 탄 소령 한 명의 지휘를 받으며 헌병 트럭 4대에 분승한 헌병대 300여 명이 카빈총으로 무장하고 안국동 쪽에서 중앙청 앞으로급히 이동하여 왔다.조선일보』1960. 4. 19 석3면.
일부 기록에는 모두 7대의 트럭이 사이렌을 울리며 왔고, 곧 바로 뒤에는 소방차 2대와 3대의 시내버스에 탄 경찰 증원부대가 도착하였다고 한다(현역일선기자동인 편, 86쪽).이를 본 시위대는 사나운 물결처럼 그쪽으로 밀어닥쳤다. 다음 순간, “죽여라!”하는 함성과 함께 돌이 날기 시작했다. 중앙청 앞은 몰려드는 학생들로 뒤덮였으며, 시위대를 바라보는 군중들은 박수를 그치지 않았다.『조선일보』1960. 4. 19 석1·3면 ; 『동아일보』1960. 4. 20 조1·3면, 석3면 선두에 섰던 지프차 유리가 돌팔매에 맞아 산산조각이 났다. 차 안에 탔던 경관 1명은 돌에 맞아 안면에 부상을 입었다. 호스로 붉은 물을 쏘아대던 소방차 2대도 시위대가 던진 돌에 부서져 후퇴하였다.『조선일보』1960. 4. 19 석1·3면 ; 『동아일보』1960. 4. 20 조1·3면, 석3면 트럭에서 내려 집총을 하고 정렬하던 헌병들은 약 5분 후에 다시 트럭을 타고 삼청동쪽으로 빠져나갔다.현역일선기자동인 편, 86쪽
학생들은 전우가와 6·25의 노래를 부르며 돌을 던졌는데, 이로 인해 문교부문교부는 지금의 교육부이며, 당시 중앙청 옆 2층짜리 가건물(현 고궁박물관 자리)의 1층을 사용하고 있었으며, 2층은 부흥부가 사용하고 있었다. 부흥부는 6·25전쟁 뒤 경제부흥을 위해 1955년2월 17일 신설된 기관으로, 종래 기획처 대신 조직된 경제계획기구였다.유리창이 깨지자 경찰은 다시 최루탄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흥분한 학생들은 통의동파출소에 몰려들어 점거하고, 유리창과 기물을 마구 파괴하였다.시위대는 경찰서에 있던 내부시설을 모두 길가에 꺼내놓고 소각했다고 한다(『한국일보』1960. 4. 19 석3면).중앙청안에서 대기 중이던 완전무장한 경찰대 30여 명이 일제히 학생들을 향해 뛰어들면서 권총과 M1소총으로 수 백 발의 실탄을 하늘을 향해 쏘았다. 놀란 학생들은 뒤로 물러 났고, 이 틈을 타서 경찰은 수 십 발의 최루탄을 사방에 던졌다. 서울대 사대 학생들과 동성중·고등학교 학생들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살인경찰 물러가라!”, “학생에 간섭치말라!”, “데모대를 살인하지 말라!”고 외쳤다.현역일선기자동인 편, 89쪽 중앙청 앞에서 발생한 시위로 학생수 명이 부상을 입고 대학병원으로 옮겨졌다.『조선일보』1960. 4. 19 석1면
시위대에 섞여있던 남루한 옷차림의 청소년 약 300-400명은 무장경관의 발사에 흥분하여 중앙청 돌담을 뛰어넘었다.『 동아일보』1960. 4. 20 조1·3면.
조선일보는 중앙청 돌담을 뛰어넘은 학생 수를 400-500명으로 기록하였다『( 조선일보』1960. 4. 19 석1면).이들은 문교부와 부흥부 청사를 때려부수는 한편, 부흥부 앞에 세워놓은 차량 10여 대를 부수어서 엎어놓고 뒤뜰에 가서 문교부 장관 차 등 차량 6대를 파괴하였다. 완전히 폭력화한 이들은 중앙청 등사실을 부수고 수만 장의 종이를 뿌려 던졌으며, 문교부 영화검열실도 파괴하였다. 이 소동으로 중앙청본청에 있는 공보실 1·2·3층의 유리창과 2층에 있는 국무위원 회의실 유리가 산산 조각이 났다. 시위대는 중앙청을 점거하였고, 공무원들은 전원 대피하였다.『조선일보』1960. 4. 19 석1·3면 ;『동아일보』1960. 4. 20 조1·3면, 석3면.
중앙청 안으로 들어간 일부 어린 시위 대원들은 중앙청 철문을 안에서 열고 뒷길을 텄다고 한다(안동일·홍기범 공저, 230쪽). 이 시각, 홍진기 내무, 김정렬 국방, 최재유 문교장관은 경무대에 있었고, 다른 장관들은 중앙청 2층 회의실에서 회의를 하고 있었다(현역일선기자동인편, 163쪽).
해무청 옆엔 완전무장한 장갑차가 대기하고 있었는데, 이 앞에서 서울신문사 지프차가 학생시위대에 의해 부서지고, 서울신문사 기자는 부상당하였다.『조선일보』1960. 4. 19 석1·3면 ;『동아일보』1960. 4. 20 조1·3면, 석3면 통의동파출소는 내부가 소각되었다. 문교부 옆 전차정류장 근처는 그칠 새 없이 밀려드는 학생들의 환호성과 고함으로 가득 찼다. 이들을 바라보고 있던 군중은 그칠 줄 모르는 박수를 보냈다.『조선일보』1960. 4. 19 석1·3면 ;『동아일보』1960. 4. 20 조1·3면, 석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