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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증가하는 학생 시위대

오전 11시 35분 경, 주먹을 불끈 쥐고 하얀 가운을 입은 서울대 의대와 약대 학생들 1천여 명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외치면서 중앙청을 향해 시위를 시작하였다.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학생들의 시위참여는 두 단계로 구분될 수 있다. 하나는 서울대 시위대 주류 속에서 행해진 기초 1·2학년 학생들의 질서정연한 행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오후부터 시작된 임상 3·4학년 학생들의 눈부신총상자 구호활동이었다(서울대학교 의과학생 자치위원회, 「백색 까운들의 수기」, 이강현 편, 157쪽). 12시 20분 경, 이들은 세종로를 통해 중앙청 앞으로 몰려든 학생들로 인해 길이 막히자 한국일보사 앞길에 주저앉아 농성하였다.『조선일보』1960. 4. 19 석1·3면 ;『동아일보』1960. 4.20 조1·3면, 석3면
12시 5분 경 중앙대학교 학생 약 4천 명도 “의에 죽고 참에 살자”는 교훈을 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마산학생 석방하라”, “고문경관은 국민 앞에 나서라”, “김주열군의 사인을 밝혀라”, “경찰은 자유당의 사병이 아니다”, “부정선거를 다시 하자”, “평화적 시위는 국민의 권리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흑석동을 출발하여 한강을 건넜다. 여학생들도 함께 뛰면서 물을 날라다 주기도 하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중앙대학교 학생자치위원회, 「젊음과 사랑과 조국과」, 이강현 편, 173-188쪽 ;『중대신문』1961. 4. 20 1·3면.
중앙대 학생들이 시위를 하려 하자 임영신 총장은 “여러 학생들이 교문을 나서기 전에 꼭 할 말이 있다. 시민들이 내가 부통령에 낙선됐기 때문에 어린 학생들을 이용한다는 의혹을 갖게 하지 말 것이며, 부정선거를 규탄한다는 미명 아래 감정만으로 지나친 행동을 하지 말고, 의에 죽고 참에 산다는 교훈을 명심해 주기 바란다. 한편 냉정과 침착, 이성을 잃지 말고, 인명피해가 없도록 해주면 고맙겠다”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동아일보는 중앙대가 “학생은 폭력에 굴하지 않는다”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위를 하였다고 하고(『동아일보』1960.4. 20 조3면), 『조선일보』는 중앙대 시위대의 학생 수를 3천명으로 보도하였다(『조선일보』1960. 4. 19 석3면).
이들의 목적지 역시 국회의사당 앞이었다. 영등포경찰서에서는 백차와 트럭에 약 30명의 경관을 동원하여 이들을 제지하였으나 학생들은 투석하면서 행진을 계속했다. 연도 주민들은 박수를 치며 시위대를 환영했다. 노량진에서는 남한강파출소에서 소방차 4대를 동원해 중앙대생들의 시위를 막으려 했으나 학생들은 역시 투석으로 맞서며 용산을 거쳐 서울역을 통과, 중앙청 앞에서 다른 시위대와 합류하였다.『중대신문』1961. 4. 20 1·3면 ; 『조선일보』1960. 4. 19 석1·3면 ; 『동아일보』1960. 4. 20조1·3면, 석3면.
경무대 앞에서 전진이 좌절된 중앙대 학생들은 2대로 나뉘어 1대는 경찰무기고 앞에서 다시 농성에 들어가고, 다른 1대는 반파된 관용 지프차 2대를 앞세우고 국회의사당과 시청 쪽으로, 화신백화점을 지나 안국동으로, 그리고 자유당 중앙당부 앞으로 구호를 외치며 달렸다. 시위대는 다시 종로, 돈화문, 남산, 충무로를 지나 내무부 청사 앞에서 연좌 농성하였다(중앙대학교 학생자치위원회, 179-181쪽).

같은 시각, 18일 깡패의 습격으로 부상당한 학생 30여 명과 여학생 100여 명이 포함된 고려대생 3천여 명도 교정을 출발, 정문에서 약 500미터 지점에 막아놓은 버스 2대를 뚫고 진출하였다.안동일·홍기범 공저, 234-236쪽 ; 조화영 편,89쪽.
이날 고려대 학생들은 18일 시위의 후유증으로 19일에는 시위예정이 없었으나 대광고등학교 학생들이 경관에 쫓기는 광경을 보고 우발적으로 시위에 참여하였다 한다(안동일·홍기범 공저, 236쪽).
이들을 제지하는 경찰은 안암동파출소 앞에서 최루탄 10여 발을 쏘았고, 소방차 2대는 붉은 물을 뿌려댔다. 고려대생들은 계속 진출, 오후 1시 30분 경 국회의사당 앞에 이르러 결의안을 낭독하였다.『고대신보』, 1960. 5. 3 2면 ; 『조선일보』1960.4. 19 석3면.
이날 고려대생들은 의사당 앞에서 결의안을 낭독한 후 흥분한 군중 속에 합류하지 않고 조선호텔·동화백화점·퇴계로를 거쳐 종로 5가로 빠져나와 “계엄령을 철회하라”등 구호를 외치면서 학교로 돌아왔다(안동일·홍기범 공저, 236-237쪽).
고려대학교 결의안 우리가 이미 주장해 오던 모든 요구를 관철하고 다시금 이 참상을 야기시킨 책임자들을 문책할 것은 물론, 당국은 금반 3·15선거를 무효화하고 재선거를 실시할 때까지 데몬스트레이션을 계속할 것을 엄숙히 결의한다. 출처 : 안동일·홍기범 공저, 『기적과 환상』, 영신문화사, 1960, 236-2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