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증가하는 학생 시위대
12시 5분 경 중앙대학교 학생 약 4천 명도 “의에 죽고 참에 살자”는 교훈을 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마산학생 석방하라”, “고문경관은 국민 앞에 나서라”, “김주열군의 사인을 밝혀라”, “경찰은 자유당의 사병이 아니다”, “부정선거를 다시 하자”, “평화적 시위는 국민의 권리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흑석동을 출발하여 한강을 건넜다. 여학생들도 함께 뛰면서 물을 날라다 주기도 하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중앙대 학생들이 시위를 하려 하자 임영신 총장은 “여러 학생들이 교문을 나서기 전에 꼭 할 말이 있다. 시민들이 내가 부통령에 낙선됐기 때문에 어린 학생들을 이용한다는 의혹을 갖게 하지 말 것이며, 부정선거를 규탄한다는 미명 아래 감정만으로 지나친 행동을 하지 말고, 의에 죽고 참에 산다는 교훈을 명심해 주기 바란다. 한편 냉정과 침착, 이성을 잃지 말고, 인명피해가 없도록 해주면 고맙겠다”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동아일보는 중앙대가 “학생은 폭력에 굴하지 않는다”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위를 하였다고 하고(『동아일보』1960.4. 20 조3면), 『조선일보』는 중앙대 시위대의 학생 수를 3천명으로 보도하였다(『조선일보』1960. 4. 19 석3면).
경무대 앞에서 전진이 좌절된 중앙대 학생들은 2대로 나뉘어 1대는 경찰무기고 앞에서 다시 농성에 들어가고, 다른 1대는 반파된 관용 지프차 2대를 앞세우고 국회의사당과 시청 쪽으로, 화신백화점을 지나 안국동으로, 그리고 자유당 중앙당부 앞으로 구호를 외치며 달렸다. 시위대는 다시 종로, 돈화문, 남산, 충무로를 지나 내무부 청사 앞에서 연좌 농성하였다(중앙대학교 학생자치위원회, 179-181쪽).
같은 시각, 18일 깡패의 습격으로 부상당한 학생 30여 명과 여학생 100여 명이 포함된 고려대생 3천여 명도 교정을 출발, 정문에서 약 500미터 지점에 막아놓은 버스 2대를 뚫고 진출하였다.
이날 고려대 학생들은 18일 시위의 후유증으로 19일에는 시위예정이 없었으나 대광고등학교 학생들이 경관에 쫓기는 광경을 보고 우발적으로 시위에 참여하였다 한다(안동일·홍기범 공저, 236쪽).
이날 고려대생들은 의사당 앞에서 결의안을 낭독한 후 흥분한 군중 속에 합류하지 않고 조선호텔·동화백화점·퇴계로를 거쳐 종로 5가로 빠져나와 “계엄령을 철회하라”등 구호를 외치면서 학교로 돌아왔다(안동일·홍기범 공저, 236-237쪽).